여름.... 장마... 소나기.... 그리고 지렁이.
난 비가 오면 문득 슬퍼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의 알갱이들에 취해,
빗방울의 소리와 질감에 이끌려,
지렁이들은 땅 속에서 마구 뛰쳐나온다.
온몸의 세포가 비의 소리, 냄새, 질감, 맛으로 가득 차 일렁인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경쾌한 음악소리에 흠뻑 젖어 비를 만끽한다.
진흙탕 위를 뒹굴어 보고, 물웅덩이에도 뛰어들며 미친 듯이 즐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온몸을 감싸는 이 황홀한 느낌은 처절한 흐느낌으로 바뀐다.
따릉 따릉 지나간 자전거 바퀴에
궁금증 많은 아이가 찌른 나뭇가지에
미친 속도로 다가오는 자동차 아래에
무심코 디딘 인간의 발 밑에
지렁이는 생애 가장 행복한 날에
비가 축복처럼 내리는 날에
죽어야만 했다.
이제 지렁이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뺀다.
다음 생에는 꼭 이슬과 나무와 꽃이 가득한 숲에서 태어나야지
하루종일 비를 흠뻑 맞을 수 있는 깊은 골짜기에서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며...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라간다...
으으....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뛰놀던 흙이 되려나
아님 물웅덩이의 물이 되려나
아님 나뭇잎의 이슬이 되려나
아아.. 경쾌한 빗소리가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