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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Nov 02. 2021

악(惡)이 시작되는 순간

<버진 리버>

캘리포니아 주 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버진 리버(Virgin River)'. 차를 몰고 한 시간쯤 나가야 읍내 정도에 해당하는 곳이 나오고, 본격적인 도시로 나가려면 최소 두세 시간 이상 차를 몰아야 하는 곳.

LA의 큰 병원에서 일하던 임상간호사이자 조산사 멜(Mel)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 일을 연달아 겪은 후 다소 충동적으로 이 버진 리버 병원의 구인 광고에 지원하여, 아무 연고도 없던 촌구석에 오게 된다.

완고한 72세의 의사 버넌(Vernon), 버진 리버 시장이자 온 동네 '오지라퍼'인 호프(Hope), 동네 유일의 바(Bar)를 운영하는 잭(Jack), 잭의 바에서 의외로 엄청난 수준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프리쳐(Preacher), 베이커리 트럭을 운영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 페이지(Paige) 등 버진 리버 사람들과 멜이 만나,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치유받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버진 리버 최고의 제빵사 페이지는 하나뿐인 아들 크리스(Chris)를 금쪽같이 생각하는 싱글맘이다. 아침마다 커피와 도넛을 사 가는 마을 단골 고객도 많고, 잭의 바에 각종 파이와 머핀을 납품하기도 한다.

페이지만 빼고 다들 알 정도로 페이지를 아끼고 각별하게 생각하는 프리쳐는 어느 날, 페이지의 차에 배터리가 나간 것을 고쳐 주다가 차량 안에서 페이지의 오래된 운전면허증을 줍게 된다. 그런데 거기 적혀있는 이름은 페이지가 아닌 '미셸 로건'. 미셸 로건을 검색해 본 프리쳐는 그가 폭행, 기물 파손과 납치 등의 혐의로 수배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어두운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야.'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법.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프리쳐에게 페이지는 진실을 털어놓는다.

페이지의 진짜 이름은 미셸 로건이었다. 웨스 로건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연애할 때부터 가족들은 그 남자와 헤어지라며 페이지를 말렸지만 사랑에 눈이 먼 페이지는 듣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폭력이 시작되었고, 경찰인 웨스는 자신의 직업을 이용해 페이지가 가해자 내지는 원인 제공자인 것으로 만들었다. '가스 라이팅' 당하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외면당한 페이지는 그저 참고 사는 방법밖에 몰랐지만, 어느 날 웨스가 크리스에게까지 손을 대자 그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혼하고 양육권 소송을 하게 되면 웨스가 사회적으로 고립시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자신이 불리할 것은 뻔했다. 페이지는 크리스를 데리고 도망쳤고, 아무도 자신들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촌구석 버진 리버에 정착했다. 베이커리 트럭에서 수표도 신용카드 거래도 하지 않고, 오직 현금으로 장사하고 크리스는 홈스쿨링을 시키면서 숨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지가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진다. 웨스가 자신들을 찾아온 것이다. 또다시 맞고 강제로 끌려갈 위기에서 저항하던 페이지는 크리스를 지키려고 하다가 계단에서 웨스를 밀쳐 죽이게 된다.

이미 폭행에 기물 파손 전력이 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웨스가 판을 짜 놓은 상황인데, '과실치사'가 인정이나 될까. 어쨌든 감옥에 가게 되겠지. 미국은 가정 폭력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이 적극적인 편이지만, 문제는 웨스가 바로 공권력을 가진 집단의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페이지는 억울하고 기구한 운명에 쫓겨 자수하러 갈 짐을 싸면서 프리쳐에게 크리스를 부탁하지만, 프리쳐는 다른 선택을 제안한다.

"네가 감옥에 가면, 크리스는 법원이 맡게 돼. 내가 맡겠다고 해서 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크리스에게는 엄마가 필요해. 그러니까 이대로 크리스를 데리고 버진 리버를 떠나.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게."



나는 사람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편이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그 악행을 저지르게 된 배경이 있다고 말이다. 불행하거나 부당한 일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므로 결국 악행을 저지르기로 '선택'한 그 사람의 책임이 아주 면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날 때부터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어떠한 환경이나 상황 하에서 그렇게 되는 수도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마다 주연 대비 별 설명이 없는 조연이나 엑스트라들이 마음에 걸려서 '저 사람은 왜 그랬을까', '이러이러한 일을 겪었기에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참 동안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가 이해할 수 있는 악인일까, '매력적인 악역 캐릭터'가 될 수 있는 한계는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하게 추측하면, 웨스도 폭력적인 보호자에게 학대받으며 성장했을 확률이 있다. 웨스 역시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그 아버지는 사기를 당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가정폭력범이 된 것인데, 사기를 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협박을 당해 그런 거였고, 그 협박범은… 하는 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들 모두에게 '이유가 있었다'라고 할 수 있을까? 남은 에피소드에서 행여 웨스의 성장 환경이 불행했다고 밝혀진다 해도, 그가 '매력적인 악역'이 될 수 있을까? 내 답은, '아니오'이다.


나는 악(惡)이 시작되는 순간을 ‘다른 선택지가 있음에도 가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직접적인 복수’가 최소한의 이해를 바랄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복수처럼, '딱 그 가해자에게 한하여 자신이 입은 피해와 같은 크기의 보복을 하는 것'은 두둔까지는 못해도 일말의 이해라도 되지만, 또 다른 약자를 피해자로 만드는 그때,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고 이해받아서도 안 되는 악인이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아내와 아들을 피해자로 만든 웨스는 '매력적인 악역'이나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없다.

한 가지 다소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논리에 의하면 살인은 차라리 이해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강간이나 가정폭력은 '이해가 될 만한' 예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버진 리버>는 현재 시즌 3까지 넷*릭스에 있는데, 시즌 4와 5까지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시즌 3은 아마도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진 채로 끝날 모양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인생도 있다."는 식의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내 말에 이웃이 "네 취향일 것 같아."라며 추천해주길래, 완결이 났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보기 시작한 나는 시즌 3의 남은 에피소드들을 다 보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그만 보지도 못하겠고,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영어로 'stuck'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미국 시골의 생활상이 궁금하거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인생도 있다."를 보여주는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나와 함께 'stuck'되어 보자고 권하고 싶다. 시즌 4와 5가 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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