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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Nov 16. 2021

이런 드라마 더 주세요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어느 에피소드, 어느 캐릭터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좋았다고 해야 '주책맞지' 않을까. 보는 내내 좋았다, 다 좋았다고 하면 너무 객관성 없고 심지어 성의 없는 리뷰로 들리겠지.

하지만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 드라마는 정말, 보는 내내 좋았다.



조금은 못난 고백으로 이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19년 말, 한국에 갔을 때 회사 후배 S가 <검블유> 드라마 DVD를 선물해 주었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S는 그때, 최근 들어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라고 강력 추천을 했다. 나를 생각해준 것도, 재미있는 한국 드라마를 챙겨준 것도 고마웠지만, 나는 그 DVD를 받은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유는 그 드라마가 온통 커리어우먼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다소 비자발적으로 퇴사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 그때의 나는 그 드라마를 즐기며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멋진 착장에 자차 출근을 하기는커녕 최대한 편한 신발을 신고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서 전철역까지 전력 질주하는 워킹맘이었고, 업계 특성도 전혀 다르고 주인공들처럼 팀장이나 임원은 까마득하게 먼 연차였지만, 그래도 드라마 속 인물들의 치열한 일상과 동료들과의 대화 장면을 보니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때가 그리워졌다. 심지어 다소 피곤했던 부서 간 신경전과 당시에는 신경 쓰기 지긋지긋했던 사내 역학관계, 그 스트레스를 동료들과의 술 한 잔으로 달래던 것까지 그리워지려고 했다. 회사와 관련된 모든 것, 나름 인정받았던 내 일과 존중받았던 나의 영역이 그리워 눈물이 나려고 해서, 그 드라마를 볼 수가 없었다.

S에게 미안해서, 그 드라마를 못 보고 있는 이유를 ‘집에 있는 DVD 플레이어가 고장 나서’라고 둘러댔다. 솔직히 말해도 S는 이해해주었을 테지만, 그냥 그런 못난 내 생각을 들키고 싶지 않았었다.


얼마 전, 드디어 이 드라마의 정주행을 마쳤다. 몇몇 장면들에서 눈물이 날 뻔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시간은 대부분의 것을 낫게 하나보다.



<검블유>는 인터넷 포털의 양대 산맥인 '유니콘'과 '바로', 두 업체에서 일하는 배타미(임수정 분), 차현(이다희 분), 송가경(전혜진 분) 세 여성의 이야기이다.

현재 '바로'에 근무하는 차현은 송가경과 고등학교 때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송가경과 배타미는 십 년 넘게 '유니콘'에서 함께 일 한 사이이다. 현에게도 타미에게도 존경하는 선배였던 가경이지만,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KU그룹의 막내아들과 정략결혼을 한 후 친정의 가세가 기울면서 조금씩 사람이 변해간다. 유니콘의 임원인 가경은 시어머니인 KU그룹 장희은 회장(예수정 분)의 말을 거스르지 못해 유니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되고, 이에 실망하고 점차 가경과 멀어지던 타미는 어떤 사건으로 바로로 이직하게 된다. 드라마는 바로와 유니콘의 점유율 전쟁, 포털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이슈, 사내 정치, 그리고 세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여성 세 명이 주인공이라는 점도 좋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동기와 욕망을 가진 많은 여성 캐릭터가 나온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내가 가장 신선하다고 생각했던 관계는 KU 회장 장희은과 유니콘 대표이사 나인경(유서진 분)이었다.

장 회장은 자신을 제외하면 전부 중노년 남성들 뿐인 골프와 등산 모임에서 정계 인물들과 꾸준히 인맥을 쌓고 KU를 이끌어 온, 아부와 타협부터 위법과 협박까지 필요하다면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다. 시작은 남편의 내조자였을지 모르나, 남편이 죽고도 KU를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워 왔고, 그런 그를 정계에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장남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지 않고 직접 경영 전반에 나서는, '재벌가의 안주인'이 아닌 그냥 '재벌'이다.

나인경은, 극 중 표현된 바에 의하면 "돈 있는 사람 앞이라면 개처럼 엎드리고, 힘 있는 사람 줄이라면 그게 썩은 동아줄인 줄 알면서도 붙들어서" 유니콘 대표이사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은 그게 실력이라고" 말하는 장 회장의 수족 노릇을 충실히 해 왔지만, 개인적인 업무 능력이 출중하거나 다른 직원들로부터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은 딱히 아닌 듯하다.

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휘두르며 그것을 즐기는 인물과 업무 능력은 없지만 '줄'을 잘 타서 승승장구하는 인물, 그리고 언제든 계산이 안 맞으면 팽하고 팽 당할 수 있는 관계.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던 이런 악역들을 여성 배우들이 하니 새로웠다. 그간 여성 악역들은 못된 시어머니이거나, '베갯머리송사'로 권력자인 남편을 좌지우지하거나,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사용해 남자를 유혹하거나 재산을 가로채는 정도였는데.


가경의 캐릭터도 매우 신선했다. '이상주의자'에 가깝고 정의감 넘치는 현이나, 회사의 이해에 민감하고 시장 논리에 충실하지만 그래도 어느 ‘선’은 넘지 않는 타미와는 달리, 가경의 ‘선’은 조금 더 유연하다. 현이나 타미와 같은 선택을 할지라도 그 동기는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극의 후반부에 가경이 '많은 것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때도 가경은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을 대비책이랄까, 일종의 무기를 확보해 두고 있었음이 뒤늦게 나온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나는 가경에게 실망스럽기는커녕 감탄이 나왔다.


그 밖에도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마블의 최근작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를 보고 아시안 캐릭터가 ‘떼’로 나와서, 다양한 아시안이 나와서 좋았던 것처럼, 여성 캐릭터가 ‘떼’로 나와서 노년 여성, 중년 여성, 젊은 여성, 정의로운 여성, 약삭빠른 여성, 엉뚱한 여성, 성격 좀 이상한 여성 등이 나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검블유>를 검색하면 세 주인공들의 남성 파트너들에 초점을 맞추어 ‘직진 연하남’이니, ‘쓰랑꾼(인성은 쓰레기지만 사랑꾼이라는 의미)’이니 하며 로맨틱한 장면들을 다룬 리뷰들이 많았는데, 실제 드라마를 본 감상은 로맨스 관련 내용이 전체 극의 40% 비중을 넘지 않는 듯했고, 사랑이라는 것이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 정도, 그러니까 반 이상을 차지하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한국 드라마는 경찰 드라마에서는 경찰이 연애를 하고, 의학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연애를 한다”고들 한다. 특정 직업군의 일과 사랑을 다루었다고 하는 드라마에서 ‘일’을 다룬 비중이 더 큰 드라마는 나로서는 처음 본 것 같다.



<검블유>를 보면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가 떠오르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네 주인공들 중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고 가장 성(性)적으로 자유분방한 사만다 존스(Samantha Jones)가 남긴 명대사가 있다.

"I love you, but I love me more."


청문회 생중계에서 현직 국회의원 주승태(최인호 분)의 미성년자 성매매 의혹을 터뜨리고 일약 스타(?)가 된 타미가 주승태와 검찰청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승태는 타미에게

"뭐가 널 이렇게(야심 있고 욕망을 추구하게) 만들었을까?"

라고 비아냥거린다.

그가 그동안 여성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욕망은 가정에 대한 욕망 아니면 성적인 욕망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녀 아니면 창녀. 아내나 딸처럼 자신의 '보호해야 할' 여성과 자신이 '사고팔 수 있는' 여성, 이 두 가지 구분밖에 몰랐을 것이다. 직장 동료로, 동등한 시민으로, 자신과 같은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여성을 대할 줄 모르는 주승태의 말에 배타미는 이렇게 일갈한다.

"뭐 부모님 원수를 갚거나 전남편한테 복수하거나, 그런 이유를 기대하는 거야? 내 욕망에는 계기가 없어. 내 욕망은 내가 만드는 거야, 상상도 못 했겠지만."



S에게 좋은 드라마를 알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한번, 이번에는 제대로,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럴 확률은 높지 않겠지만 <검블유> 작가님이나 제작진 여러분, 또는 방송 관계자분이 혹시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꼭 부탁하고 싶다.

이런 드라마 더 많이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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