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지 Dec 15. 2021

내 아이가 이런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넷*릭스에서 3편의 영화로 만들어진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제니 한(Jenny Han)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 라라 진(Lara Jean)의 엄마가 한국계라는 설정에, 한국 음식이나 명절 등 한국에 관련된 소재가 이따금 등장해서, 화면 속 오리건 주(州)는 비록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풍경과 전혀 다르지만 보는 내내 조금 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라라 진은 다소 소심한 면이 있는 고등학생. 로맨스 소설을 주야장천 읽으며 언젠가 자신에게도 다가올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방 꾸미기와 베이킹(Baking)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소녀소녀 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 엄마는 어릴 적 사고로 돌아가시고, 산부인과 의사인 아빠와 언니, 여동생과 함께 산다.

라라 진에게는 작은 비밀이 있는데, 어떤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되면 그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다. 다만, 쓰기만 하고 부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마음을 고백할 용기도 없고, 사랑하다 상처 입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한 라라 진은 그저 모든 감정을 갈무리해 편지에 적고 자신만의 보물 상자에 넣어둔다. 지금까지 그렇게 라라 진이 혼자만 좋아하다 접어 둔 남자아이는 총 다섯 명.

어느 날, 이 다섯 통의 편지가 모종의 이유로 라라 진도 모르게 발송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비밀 편지가 각각의 상대에게 발송되어 버렸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등교한 라라 진은, 첫 번째 수신자 피터(Peter)가 낯익은 편지 봉투를 들고 곤란한 표정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그만 기절해 버린다. 몇 초 후, 정신을 차린 라라 진에게 피터는

"네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었다니 정말 영광이야.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여자 친구가 있어."

라고 매우 정중하게 거절의 말을 한다.

여기에서 약간의 일이 꼬이면서 피터와 라라 진은 엉겁결에 키스를 하고 대외적으로 사귀는 척하기로 계약을 맺었다가 결국에는 진짜로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그 부분은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피터와의 대화를 마친 후, 당황해서 숨다시피 화장실로 달려 들어간 라라 진에게 옆 칸에서 루카스(Lucas)의 목소리가 들린다.

"라라 진? 괜찮아?"

"..."

"이거,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루카스는 화장실 아래 틈으로 라라 진의 두 번째 편지, 언젠가 루카스를 향해 썼던 러브 레터를 돌려준다.

"네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었다니 기뻐. 근데, 너도 알지? 나 게이잖아."

"어, 알아(사실은 몰랐지만, 달리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루카스. 이거 진짜 옛날에 쓴 편지야! 보낼 생각도 아니었고. 대체 어쩌다 발송되었는지 모르겠어."


이 장면을 보면서, '내 아이가 피터나 루카스처럼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연애의 대상으로 좋아하지 않는, 혹은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고백을 받았을 때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고 조용히 거절할 수 있는 사람,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예의를 갖추어 예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1편에는 수신 확인이 되지 않았다가 2편에 등장하는 (John) 인격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존은 6학년 때 라라 진의 짝사랑이었다. 봉사 활동하러 간 노인 복지 센터에서 몇 년 만에 우연히 존을 다시 만나고 라라 진은 조금 흔들린다. 1편의 사건으로 연인이 된, 라라 진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다소 섬세하지 못한 피터와는 달리 존은 사람의 감정을 잘 살필 줄 아는, 어떤 면에서는 소심하고 감성적인 라라 진과 더 잘 맞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고등학생.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달라지고, 정확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헷갈릴 나이이다. 아니, 사실 그건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이지만, 여하튼 더욱 미숙하고 불안정한 나이.

피터의 전 여자 친구와 관련된 오해가 겹쳐 피터와 라라 진은 헤어지고, 라라 진은 눈 오는 날 존과 키스까지 하게 되지만, 키스의 순간 라라 진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피터라는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는다.

사과하는 라라 진을 존은 그냥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보내 준다. 영화에서는 이 정도이지만, 소설에서의 존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라라 진이 존을 좋아한다는 편지를 썼던 6학년 때)는 우리의 때가 아니었어. 아마 지금도 아닌가 봐.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때가 올지도 모르지."

그리고 둘은 친구 사이로 돌아간다.


'좋아하는 마음'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은 내가 이러한 인풋(Input) 넣으면 그에 따른 아웃풋(Output) 출력하는 기계도, 어떠한 것을 요구하면 이를 들어주는 NPC(Non Player Character ; 게임에서 사람이 직접 조작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뜻으로, 사람이 조작하는 캐릭터에게 물건을 팔거나 정보를 주는  정해진 동작만을 수행한다.) 아니고, 나와 똑같이 자유 의지를 가진,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때로는 이것을 잊는 것 같다. 내가 잘해줬지만 나랑 사귀지 않는 상대에게 화를 내고 ‘꽃뱀' 취급하기도 한다. "내가 이만큼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가 정당한 분노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건의 가성비를 따지듯, 사람의 마음도 가성비를 따져 '투자한 만큼 돌려받으려' 한다. 심지어 이런 마음이 지나쳐 범죄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존은 그저, 자신이 라라 진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라라 진이 자신을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슬퍼할 뿐이다. 그동안 라라 진에게 내가 무엇을 해줬고 어떻게 대했는데, 따위를 곱씹으며 분노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며 사과하는 말에 "나를 가지고 놀았냐"라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의 태도가 특별히 '훌륭한' 게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요즘 너무 많이 보고 듣게 된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원작 소설을 읽는 내내, 세 편의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궁금했다.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다 이렇게 성숙한 걸까? 뭐 이렇게 다 신사적이고 멋있지? 미국에서 자라면 다 이래? 다 이렇게 남의 감정을 존중하는 법을 알아? 내 아이들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럼? 아니면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들이라 그런가? 실제 여기서 고등학교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어떻게 생각할까? 이거 판타지예요, 어느 정도 현실성 있어요? 아, 누가 말 좀 해줬으면.'

작가의 판타지인지, 아니면 정말 미국의 평균적인 고등학생이 이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피터와 루카스, 그리고 존을 좋아했던 것을 보면, 라라 진의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말 훌륭한 것 같다.


풋풋하고 아름다운 연애 이야기를 보면 내 마음이 설레기보다는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이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많이 드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도 않다. 내 아이가 피터, 루카스, 그리고 존처럼, 자신만큼 타인을 존중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이로운' 평행 우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