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지 Dec 04. 2022

'상남자' 택이

<응답하라 1988>

'여러 명의 남주인공들 중 여주인공의 남편이 과연 누구인가'를 추리해보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세 번째 편인 <응답하라 1988>이 한창 인기이던 2015년, 나를 제외한 우리 팀원 전부는 점심시간마다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파와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파로 나뉘어 있었다. 누구를 응원한다기보다는 심심풀이 삼아 추리를 해보는 것이었는데, 나는 당시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지만 양측의 추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어서 이 대세에 동참하라고 웃으며 권하는 팀원들에게 나는 드라마가 완결된 후에, '어남류'로 결정되면 보지 않고 '어남택'으로 결정이 나면 보겠다고 했다. 팀원들은 단지 내가 박보검 배우의 팬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간 들은 소문에 의하면 <응답하라> 시리즈 전작들의 남편들은 전부 '츤데레', 그러니까 겉으로는 못된 말 하고 틱틱거리면서 은근히 잘해주는 캐릭터들이었다고 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츤데레라는 인물의 특성은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퍽 오랫동안 유행했다. 지금도 둘 이상의 남주인공이 있으면 한 명은 츤데레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모두에게 언제나 친절한 캐릭터나 소위 '순둥이'보다 이쪽이 더 매력 있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하긴, 나도 가수 임재범 씨가 부른 <너를 위해>의 노래 가사처럼 '다소 위험해 보이는 남자'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 해 줄 유일한 사람이 너란 걸 알아
나 후회 없이 살아가기 위해 너를 붙잡아야 할 테지만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사람들은 그를 거칠다고 생각하지만 속마음은 여린',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남자를 만나야겠다고, 애정 표현을 자주 하는 사람은 가벼울 것이고 어쩌다 한 번 툭 던지는 표현이 더 진실될 거라고 생각하던 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철이 없었구나 싶다. 내가 만약 그 ‘철없던’ 시절의 이성관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택이(박보검 분)보다는 정환이(류준열 분)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응원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정환이는 덕선이(혜리 분)를 좋아하지만, 덕선이가 자꾸만 그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를 좋아하나?' 싶은 행동을 했다가도 다음 순간 '그런데 왜 저러지?' 싶게 심술궂은 말을 내뱉는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야 정환이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그의 서툰 표현력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지만, 덕선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거나, 서운하거나, '내가 제멋대로 쟤가 나 좋아한다고 착각했나 보다.'하고 민망하거나의 셋 중 하나, 혹은 셋 다였을 것이다.

택이는 덕선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넘쳐서 그야말로 줄줄 흐르는, 소위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캐릭터다. 한 번도 덕선이를 면박 주지 않고, 농담으로라도 못생겼다고 하지 않는다. 덕선이가 과자를 먹여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주지 않는 장난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짜증 내지 않고, 다른 친구들이 모두 “덕선아 너 춤은 진짜 아니야.”라고 말리는 괴상한 춤을 추어도 그저 웃는다. 워낙 먼저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 아무도 덕선이에 대한 택의 마음을 한참 동안 몰랐지만, “네 말 듣고 나서 너 하는 거 보니 그동안 왜 몰랐나 싶더라.”라고 친구들이 말할 정도로 택은 한결같은 표정으로 덕선을 본다. 그저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극 중에서 덕선은 ‘둘째의 설움’을 흠뻑 겪는 캐릭터다.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은 언니와 며칠 차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나 덕선의 생일을 언니의 생일과 함께 ‘묶어서’ 처리해버리고, 막내는 성별이 달라 자기 옷이나 물건을 갖는 일이 종종 있는 것으로 보이나 덕선은 죄다 언니에게서 물려받는다. 첫째는 첫째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관심과 귀여움을 받는 사이에 낀 덕선은 심지어 집에 연탄가스가 샜을 때도 부모님의 구조 우선순위에서 밀려, 스스로 기어 나와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다.

그러한 덕선이가 너는 예쁘다고,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흔히들 한다는 ‘밀당’조차 없이 표현하는 택이와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거 잘 못 해. 간지러워서."

"나는 그런 말 안 해 버릇해서 못 해."

겉으로 드러나는 애정 표현이나 다정한 말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끼리 만났다면야 다행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것을 원하는데도 굳이 '나는 절대 못 한다'며 끝까지 하지 않을 일일까. "저는 그런 거 못합니다."라는 말을 군 선임이나 직장 상사에게도 그렇게 단호하게 할 수 있을까. 그냥 안 해도 되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안 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 말도 없이, 혹은 이따금씩 퉁명스레 던지는 표현만으로 자신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바란다면, 그건 좀 '도둑놈 심보' 아닐까.



드라마는 1988년의 이야기를 주로 보여주지만 간간히 2015년 현재, 중년이 된 택이와 덕선의 모습도 보여준다. 중년의 택(김주혁 분)이 여전히 순둥순둥 한 모습으로 '꿀 떨어지는' 대사만 줄줄 읊는다면 남편 찾기 수수께끼의 답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김주혁 배우가 이미연 배우(중년의 덕선)에게 다소 장난기 있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택이가 좀 변했네.'라고 생각할 시청자들을 의식해서였을까, 김주혁 배우가

"그 시절(1988년)의 나로 돌아가고 싶냐고? 아니, 난 지금이 좋은데. 그때는 너무 예민하고 힘들었어서."

라고 하는 대사도 나온다. 덕선이를 만나고 함께 살면서 성격이 좀 유들유들하게 변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꼭 한 장면, 둘의 연애 시절 일부를 보여주는 부분에서 택이가 회사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치며 노는 덕선을 발견하고 화를 내는 모습은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그것은 기존의 택이도, 덕선이랑 만나면서 여유롭게 변한 택이도 아니었다.

덕선이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거나 어울려 노는 것을 새삼스럽게 즐기게 된 것도 아니고, 덕선이는 원래 ‘끼’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택은 지금까지 덕선이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택이가 갑자기 덕선이가 다른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노는 것을 싫어한다? 혹은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단속’한다? 이것이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된 사이이기에 가능한 '애정'의 증표, 혹은 상호 독점적인 사이만의 '특권'일까? 글쎄다. 심지어 덕선이가 "회식이야, 회식."이라고 설명하는데도 화난 표정으로, 자신의 팔에 매달린 덕선을 줄줄 끌고 가다시피 하는 것은 다소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덕선에게

"아 뭐야. 덕선아, 저런 놈하고 결혼하지 마."

라고 하고 싶어지는 장면이었다.


그래도 2015년 시점에서 “가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 좀 내놓고 가.”라고 속삭이는 덕선에게 "이미 버렸지. "하고 궁디팡팡을 받는 것을 보면, 그때 그런 일이 한 번 있었을 뿐 최종적으로는 잘 성장(?)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간 다정함이 얼마나 훌륭한 덕목인지를 다소 몰라주었던 <응답하라> 시리즈가 드디어 ‘다정한 남자‘의 가치를 널리 인정한 것 같아 흐뭇했다.



유달리 한국 문화는 남자가 다정다감한 것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무뚝뚝한 남자가 '진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까지야 그렇다 치지만, 남들 보는 앞에서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남성을 '팔불출'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저래 놓고 단 둘이 있을 때는 못되게 할 것'이라는 음험한 추측을 하는 일도 있었다.(1990년대 다정한 남성의 대명사였던 배우 최수종 씨와 결혼한 하희라 씨는 "실은 맞고 산다"는 억측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한다.) 요즘도 사정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어서, 미디어에 배우자에게 애정 표현을 잘하는 남성이 등장하면 다른 남성들이 '공공의 적' 취급을 하며 비난하거나 놀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거기다 요즘은 '상남자'라는 캐릭터가 유행하는 듯하다. 남자 중의 남자, 혹은 남성미가 넘치는 남자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츤데레를 넘어서 다소간의 거칠고 폭력적인 애정 표현을 하는 경우에

"와우, 상남자네."

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유머 정도로 소비되고 심지어 '남자답다'라고 칭찬처럼 표현될 일인지,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실은 다정한 것이야말로 정말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누군가 '다정도 체력에서 나온다'라고 했다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좋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친절하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마음을 표현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상대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고 약간의 ‘쪽팔림’을 감수할 수 있는 인격적인 성숙함까지 갖추어야만 끝까지 다정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정한 사람이야말로 몸과 마음이 다 강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굳이 '상남자'라고 불러야 한다면, 다정한 사람이야말로 상남자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택이 같은 사람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