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채소연과 권준호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슬램덩크>가 요즘 아주 핫하다. 연재가 끝난 지 약 26년 만에 비하인드 스토리를 더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개봉에 힘입어 원작 만화 단행본과 화보집 또한 다시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모양새다. 20여 년 전부터 <슬램덩크>를 좋아한 나로서는 이 같은 대유행의 귀환이 반갑기도 하고,
'나는 진작부터 이 작품의 팬이었다고.'
하는 묘한 우월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북미 개봉 계획은 없는지,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이곳 텍사스에서는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나는 요즘 만화책 <슬램덩크>를 며칠째 백 스물한 번 정도 다시 읽으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대부분의 장면과 대사를 외울 정도로 읽었지만 여전히 매번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눈물을 흘리게 되는 지점이 매번 다르다. 처음에는 화풍이 매우 정교하고 마치 영상처럼 움직임과 박진감이 느껴지는 이노우에의 그림에 감탄하며 읽었는데, 요즘은 읽을수록 고작 이십 대 초중반이던 당시 어떻게 이런 인물들을 창조해 낼 수 있었는지, 이노우에의 관찰력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같이 등하교를 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꿈인 북산 고등학교 1학년 강백호. 빨간 머리카락과 유난히 큰 키로 가만있어도 눈에 띄는 데다 '백호 군단'이라는 문제아들과 어울려 다니며 불량아로 인근에서 퍽 유명한 백호는 등교 첫날 채소연이라는 소녀에게 반해, 혹시 농구 좋아하냐는 소연이의 질문에 그동안 농구의 'ㄴ'도 몰랐으면서도 그렇다고, 자신은 스포츠를 아주 좋아한다고 해버린다. 소연이의 권유로 얼떨결에 농구부에 들어가 좌충우돌 성장하며 점차 '진짜 농구선수'가 되어가는 백호의 이야기가 <슬램덩크>의 뼈대이다.
연재 당시 일본에서는 인기 스포츠가 아니었던 농구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겠다는 이노우에의 말에 편집부는 인기 소재인 '학원 폭력', '연애나 삼각관계' 등을 좀 더 비중 있게 넣어 장르를 학원물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는데, 이노우에는 이에 반발이라도 하듯 집요하게 '청소년들이 농구하는 장면'만을 주야장천 그린다. 각각의 인물들은 부모라든가 형제자매 관계, 가정환경 등이 거의 그려지지 않는다. 좀 심하게 말하면 대부분이 설정상 '하늘에서 뚝 떨어져 외동으로 살며 농구에 미쳐있는 것만 같은' 학생들인데, 그럼에도 이야기는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고 오히려 인물 하나하나의 사연과 감정이 가슴에 와닿는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살 청춘들. 그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농구만이 전부이고, 농구를 통해 그들 하나하나가 '어떤 사람인가'가 전부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농구 연습과 경기 장면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슬램덩크>에서 선수가 아닌 소연이는 당연히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백호를 농구의 세계로 이끈 소녀, 농구부 주장 채치수의 동생, 북산고 농구부의 슈퍼 루키(Rookie) 서태웅 선수를 동경하는 여학생. 이 정도가 소연이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슬램덩크>가 참 재미있기는 하지만 여성 인물의 사용 방식은 다소 아쉽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농구, 좋아하세요...?"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를 본 순간, 소연이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보고도(90년대 만화임을 감안하면 한눈에 보기에도 불량 학생, 어른들이 어울리지 말라고 하는 류의 청소년으로 보인다는 설정이다) 서슴없이 다가가 묻는다. <슬램덩크>는 소연이의 이 한 마디에서 시작된다. 소연이가 백호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슬램덩크>의 세계는 존재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방과 후, 소연은 백호를 농구부가 사용하는 코트로 데려가 '슬램덩크'라는 것을 해보라고 한다. 농구의 기초조차 모르는 백호는 당연히 공을 들고뛰다가 점프해 백보드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지만, 그 순간 소연이가 본 것은 '할 줄도 모르면서 농구 좋아한다고 나한테 거짓말을 한 아이'가 아니라 '엄청난 점프력을 가진, 농구부의 구세주가 될 수도 있는 아이'였다.
그날 밤, 어릴 적부터 전국 대회에 나가고 싶어 했지만 지금까지 좋은 팀 멤버를 만나지 못해 늘 힘들었던 오빠 치수에게 소연이는 설레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이야기한다.
"키는 190cm쯤 될까..? 농구는 처음 한다고 하는데, (중략) 백호라면 반드시 멋진 선수가 될 거야! 농구부에 들어간다고 했어!"
몇 가지 우여곡절 끝에 농구부에 들어가 무서운 속도로 실력이 성장하는 백호를 보며 늘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도 소연이다. 괜찮아, 잘했어, 백호가 강해지는 만큼 북산은 전국 제패에 다가서는 거야, 등등. 여기까지만 보면 소연이는 그저 주인공을 돕는, 착하고 예쁜 조력자의 느낌이지만.
전국 대회를 앞둔 1주일의 합숙 기간 동안 중거리 슛을 거의 마스터해 버리는 백호를 보고 소연이는 이렇게 말한다.
"백호는 단 일주일 만에, 아니, 하루 만에 나를 앞서버린 거야. 조금이지만, 질투도 나."
내가 처음에는 다소 평면적이라고 생각했던 채소연이라는 인물에게 반한 순간이었다.
소연이는 그 자신도 중학교 때까지 농구를 했던 인물이다. 197cm의 거구인 오빠 채치수에게 큰 키 유전자가 몽땅 가 버린 것인지, 소연이는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도 조금 작은 155cm 남짓이다. 운동 신경이 특출 나지도 않다. 백호가 일주일 만에 완성한 중거리 슛을 사실 소연이는 3년이나 연습했었지만, 힘이 모자라 끝내 쏠 수 없었다. 결국 소연이는 한계를 느끼고, 고등학교에 와서는 농구부를 그만두기로 한다.
하지만 소연이는 '농구부'를 그만뒀지, 농구를 좋아하는 것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농구에 대한 열정을 한 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는 소연이었기에, 백호라는 소년을 '발견'하고 오빠와 함께 전국 제패라는 꿈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농구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를 보면 동경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투도 나는 소연이었기에.
치수도 이러한 소연이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백호가 멋진 플레이를 해냈을 때 소연이를 생각한다.
'소연아, 네가 발견한 이 이상한 녀석이 북산에 꼭 필요한 남자가 되었구나.'
<슬램덩크> 원작 마지막에 소연이는 북산고 농구부의 매니저로 합류한다.
농구부를 그만뒀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은 인물로는 북산고의 식스맨, 권준호를 빼놓을 수 없다.
채치수와 같은 3학년으로 내내 농구부를 이끌며 버텨왔지만, 전국 대회를 끝으로 준호는 은퇴를 한다. 농구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178cm의 키, 천부적인 파워나 스피드나 재능은 없다. 농구로 대학에 스카우트될 가능성은 희박하고, 다행히 공부는 잘한다.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진심으로 농구를 좋아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치수가 '전국 제패'라는 다소 무리해 보이는 목표를 부르짖으며 과도한 훈련을 강요해 부원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 마침내 부의 존속마저 위태로워졌을 때까지도 농구부에 남아있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배우는 속도가 천재급이라고는 하나 고작 4개월짜리 농구 초짜 백호에게 포워드 포지션을 빼앗겼는데도 서운함이나 열등감 하나 없이 진심으로 팀의 승리만을 응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농구를 한동안 그만두고 방황 끝에 돌아온 동료의 멋진 플레이를 본 순간
'녀석들, 2년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라며 감동할 리가 없다.
원작 연재 종료 후 이노우에가 그린 <슬램덩크> 화보집에는 농구부 주전 멤버들을 태운 차를 운전하는 준호가 그려져 있다. 여전히 반쯤은 농구부 스태프로 지내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준호가 나중에 직장인이 되어서도 취미로 농구를 즐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들 사이에서야 식스맨이었지만, 직장인 리그에서는 '에이스'겠지, 선출(선수 출신)이니까.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어 동기나 후배들 중 프로 선수로 뛰고 있는 사람들의 주치의로서 농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준호의 미래 모습도 좋아한다. 이노우에가 공식적으로 그린 것은 아니고 어느 팬의 상상도(想像圖)이긴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NASA에 방문했을 때의 일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거기서 만난 청소부가 너무 즐거워 보여
"청소가 그렇게 즐거우신가요(Do you really like cleaning)?"
라고 물었더니 그가
"대통령님, 저는 단지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Mr. President, I am not just cleaning, I am helping to send human beings to the Moon.)"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주전 멤버로 경기를 뛰는 것만이 농구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거나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실익'이 있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벤치 멤버도, 매니저도 북산고의 전국 제패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주전 선수로서 뛰지 않아도, 농구로 대학에 갈 수 있을 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농구를 좋아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모두가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면 좋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갖기 어려운 신체적 한계나 부족한 재능 때문에 너무나 좋아하는 어떤 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 보통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는 없으니 다시는 돌아보지 않거나, 아니면, 그냥 계속 좋아하는 것에 만족하거나.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집요하게 그린 '농구에 다소 미쳐 있는 것 같은 고딩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읽는 사람 각자의 해석, 꿈보다 해몽에 달린 것일 게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기를 그만두지 말라고. 그냥, 계속 좋아하면 그걸로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