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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un 27. 2024

1년 만의 뚝섬 달리기

비 오는 토요일엔 역시 마라톤!

꼭 작년 이맘때였다. 그때도 시부모님과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여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뚝섬 한강공원에서 하프 마라톤을 뛰었었다.

장소는 같은 뚝섬이었지만 다른 이름의 행사였던지, 그때는 운 좋게 게스트로 초청된 이봉주 선수와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나는 친정 엄마의 팔순 기념으로 또 한 번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한번 뚝섬을 달리게 됐다.

작년에도 비가 제법 내렸었는데 올해도 역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 아래 수백 명의 러너들이 모였다.

'차라리 비가 오는 게 낫겠다. 비야 내려라...'

지난 며칠간, 내가 사는 열대지방 사이판을 가하는 서울의 찜통더위에 질려버린 나는 차라리 시원하게 비가 내리길 바라고 있었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자, 수백 명의 하프 마라톤 참가자들은 경주마들처럼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지만 습기를 왕창 머금은 축축한 공기가 사람을 슬슬 지치게 만들 무렵, 드디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그렇지! 차라리 비 맞고 뛰는 게 훨씬 낫지!'


'1년 동안 나의 기량은 얼마나 좋아졌을까, 이번엔 목표인 두 시간 내 골인이 가능할까...'등을 생각하며 뛰기 시작했지만 늘 그렇듯 레이스 후반으로 갈수록 아무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

어떻게든 이 레이스를 끝내야만 한다는 의지와, 가능하다면 단 한 명이라도 내 앞의 주자를 추월해 보겠다는 본능적인 경쟁심 외에는 다른 잡념이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체력적인 소모가 커서,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작년과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면, 이번엔 경기 초반부터 거의 후반까지 페이스 메이커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각각의 시간대가 적힌 노란색 풍선을 매달고 달리는 페이스 메이커들은 러너에게 있어 등대와도 같은 존재이다.

시간대 골인을 책임지는 페이스 메이커 두 분의 뒤 따라 악착같이 달리다 보니, 굳이 시간을 보며 페이스 확인을 하지 않아도 두 시간 내 골인에 맞는 정확한 페이스가 유지되었다.

문제는 내가 쭉 그 페이스를 유지하며 쫓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두 시간대 페이스 메이커를 쫓아가는 러너들이 제법 많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 같아서 잠시 웃음이 났다.

우두머리를 따르는 추종자들처럼 말이다.

십여 명의 추종자들 중, 유난히 거슬리게 큰 발소리를 내며 달리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도 바로 내 뒤에서 달리던 사람이라 그 유난한 발소리 때문에 급기야 내 머리가 울릴 지경이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마치 운동화 뒤축에 탭댄스용 징을 박은 듯... 흡사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도 같았던 그 소음은 정말 대단하고 특이했다.

뒤돌아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돌아보진 않았다.

하지만 나중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리만 들어봐도 뭔가 잘못된 방식으로 달리고 있는 것 같은데... 저래갖고 무릎이 남아나려나?'


반환점을 돌아 레이스 후반이 되자 조금씩 속도가 떨어지고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페이스 메이커들은 저만치 사라져 가고 있었고 어떻게든 너무 많이 쳐지지만 말자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앞만 보며 달렸다.


평소보다 빠른 페이스로 제법 긴 거리를 달린다는 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라는 건 달려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테고...

'그래도 작년보다 좀 더 나아진 것 같은데?'

나름 뿌듯한 마음에,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이미 비에 흠뻑 젖어 무거워진 운동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나서 달렸다.

레이스 후반이 되자 조금씩 걷는 주자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속도가 떨어질지언정 걷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드디어 20킬로 지점, 피니쉬 라인까지 1킬로 만을 남겨놓은 상황.

이 시점에서, 후반부에 나를 추월해 간 두 명의 젊은 처자들을 따라잡아볼까 잠시 고민해 본다.

멀리 보이던 그들도 지쳤는지 점점 속도가 떨어지고 눈에 띄게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게 뒤따라 달리는 내게도 느껴졌다. 결국 400여 미터 정도를 남겨두고 있는 힘, 없는 힘을 억지로 끌어모아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아뿔싸, 하지만 막판 스퍼트를 너무 일찍 시도했다.

호기롭게 전력질주를 시도해서 두 처자들을 추월하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아직 피니쉬 라인까지는 백여 미터의 거리가 남은 상황.

그 사이에 기운이 빠지고 에너지가 바닥나서 속도가 떨어진 나를, 결국 다시 추월해서 골인해 버린 두 처자들...

이런 게 바로 인생이던가. 아니면 이것이 바로 마라톤의 재미이던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만큼 최선을 다해 달리고 들어와 시간을 보니 1시간 59분 16초!

그렇게 여러 번 시도했었지만 늘 2시간 3~5분 등, 2시간 초반대의 기록이었던 나의 하프 마라톤.

하지만 오늘 드디어 서브 2 달성!

여전히 쏟아지는 빗속에서 뛸 듯이 기뻐하는 50넘은 아줌마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지...

하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기쁘고 행복한 마음은 항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선물처럼 찾아와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아름답게 해 주는 것이니 말이다.

오랜만의 시원하고 화끈했던 우중런. 게다가 개인 기록도 경신해서 너무도 행복했던 대회였다.

'국민 행복 마라톤'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걸까.

비단 나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참가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밝고 행복해 보이는 걸 보니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대회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6월 초, 아이들 방학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면서 이미 대회 몇 개는 사이판에서부터 미리 등록을 해 두었지만, 추가적으로 참가할 대회들이 아직 더 남아있다.

이제 겨우 한국에서의 첫 번째 대회를 마친 것일 뿐...

앞으로 얼마나 더 재밌고 다양하며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될지... 다음 대회가 무척이나 기대되고 설레는 밤이다.

가보자, 달려보자!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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