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의 망중한
우리나라 남해도 다도해로 유명하지만, 그리스도 섬이 많다. 오죽하면 그리스의 해안선 길이가 아프리카 해안선의 절반쯤 된다고 한다. 그 많은 섬들 중에 한국인의 관광지로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산토리니나 자킨토스겠지만, 우리는 이번에 크레타를 택했다. 남편은 이미 산토리니를 한번 다녀오기도 했고, 이번에 그리스를 간 이유 중 하나가 유럽 문명의 발상지라는 점 때문이니 섬 중에 하나를 택한다면 크레타가 좋을 것 같았다. 크레타는 자치국이 되었다가 이후에 그리스로 편입된 만큼 그리스 본토와도 다른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왠지 크레타에서는 거리만 걸어도 조르바를 마주칠 것 같은 막연한 감상도 한 표를 더했다. 무엇보다 지금이 아니면 크레타에는 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짧은 여행기간 동안 바삐 많은 것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추천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크레타에서 4박 5일을 보낸 것에 만족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재촉하지 않는데도 가끔씩 가슴 시리게 하는 곳이기에.
크레타는 동서로 길게 생긴 섬인데, 산지가 섬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다. 산이 낮지도 않다. 크레타 서쪽과 동쪽을 각각 관장하는 듯 우뚝 서있는 Pakhnes는 해발 2,453m, Spathi는 2,143m(출처: 구글 검색)라, 섭씨 2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방문했는데도 산봉우리에 늘 눈이 쌓여있었다. 크레타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마치 우리나라 동해를 섬으로 빚어 놓은 것 마냥 선이 굵다. 이 풍경을 보는 순간 조르바는 크레타 사람 맞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카잔차키스의 필력을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갈 능력이 안 되니, 여기에서는 그의 표현을 빌려본다.
크레타의 시골 풍경은 생각을 다듬은 구성, 군더더기 수식어가 없는 은근한 문장, 최대한 절제하여 표현한, 잘 쓴 산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박한 것도, 인위적인 구석도 없다. 표현해야 할 것은 위엄 있게, 엄격한 행간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감성과 애정이 풍겨 나왔다. 공기 중에 레몬 나무와 오렌지 나무가 흘리는 향기가 진동했고 넓은 바다는 끝없는 시구가 흘러넘쳤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육지 사람들은 쉬기 위해 섬을 찾을지 몰라도, 섬사람들에게 섬은 고락과 팍팍함이 함께 하는 현장일 것이다. 거친 바다와 함께 섬은 안온함만이 아니라 경외감을 함께 선사한다. 그래서인지 하니아 인근의 해변에서 석양을 볼 때 저도 모르게 수고했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여담이지만 그리스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리스에서 일을 해보지 않고 말하기는 섣부르겠지만) 편견이 아닐까 싶다. 크레타가 아닌 아테네 사람이긴 하지만, 아테네 숙소의 호스트였던 마리아나는 아테네 시내에 숙소를 운영하면서 택시 운전과 선박 투어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는 드물게도 한국보다도 자영업 비중이 높은 OECD 국가 중 하나이니, 자영업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 사람들을 다 매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한국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리스뿐 아니라 유럽의 일처리 속도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지만, 반대로 그들은 한국의 근로환경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수영장 저편으로 눈 덮인 산이 보이는 하니아 숙소에 도착하니 그림 한 장이 생각났다. 바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 나의 촌스러운 감성에 꽤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수영장과 선베드(날씨 때문에 정작 수영을 못해서 더 사치스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를 뒤로 한 풍경은 호크니가 그림에 담은 감정처럼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어디서 듣기로 LA에는 저런 형태의 산이 없으니 산의 모습은 영국의 산을 합성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그 해석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억에 남은 이유는 지난 15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여행을 최근에 하면서,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도 자꾸만 고향의 풍경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크레타에서 도시 간 이동도 했고, 약간의 관광도 했지만 우리가 제일 많이 한 것은 '빈둥대기'였다. 아테네 - 야간 페리 - 크노소스 궁전 일정으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이 순간에는 푹 쉬면서 마음을 채워 넣고 다시 열심히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은 풍경 덕분이었다. 돌아와서도 계속 빈둥대고 있지만, 내년엔 다시 치열한 삶으로 돌아가야 하니 빈둥댈 수 있을 때 불안해하지 않고 잘 빈둥대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아마 크레타의 풍경의 진수는 저 산악지역을 넘어 사마리아 협곡을 가는 길에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마리아 협곡은 갈 때와 올 때 길도 다르고 중간에 배도 타야 하는 코스라고 한다. 모름지기 귀한 것을 보려면 그만한 가치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라, 지불능력이 없는 우리는 무리하지 않고 북쪽 지역에 머물렀다.
(TMI) 카잔차키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이라클리오에는 그가 잠든 곳이 있다. 그리스 정교회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겨우 묏자리를 찾았다고 하는데, 마치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가 생전에 써둔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고 한다. 나 홀로 여행이라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크레타라고 하면 미노타우로스가 가장 먼저 생각나지만, 신화 속 제우스의 탄생 장소도 크레타이다. 실제 이라클리오에서 1시간 좀 넘는 거리에 신화의 제우스 탄생 동굴(Diktaion Andron)도 관광지로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제우스가 소로 변해서 에우로페 공주를 납치하는 막장 이야기의 끝에 에우로페가 낳은 세 아이 중 하나인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딴 미노아 문명이 꽃피게 된다.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미궁을 건축한 다이달로스의 아들이 이카로스이니, 크레타 섬은 그리스 신화의 주요한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잘 알려진 미노타우로스 탄생비화나, 다이달로스가 이에 일조하는 바람에 미노스 왕에게 찍혀 밀랍 날개를 만들어 이카로스와 탈출하게 되는 이야기 또한 그리스 신화 다운 막장).
신화로만 알고 있었던 약 3,600년 전의 크노소스 궁전이 발굴되었을 때 크레타인들의 느낌은 어땠을까. 남편이 적절하게 표현한 것 같아서 인용하자면, "고조선이 정말로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고 이런 유적이 남아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비잔틴 제국 이후 베네치아와 오스만 지배,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시기를 거쳐 독립한 크레타인에게는 그 의미가 더 특별할지도 모르겠다. 크노소스 궁전은 미궁으로 유명할 만큼의 규모는 물론이고, 그 옛날에 이미 상하수도나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미노아 문명은 역사 교과서에 한두 줄로 나오는 것보다 훨씬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테네의 유적도 그랬듯, 크노소스 궁전에서 나온 유물의 진품은 국립 이라클리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때문에 박물관을 함께 가야 소프트웨어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 크레타를 배경으로 하는 신화에 소가 거듭해서 등장하듯, 박물관에서도 황소 두상이나 크레타의 유행 스포츠 Bull-leaping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발견할 수 있다. 번성한 청동기 문명이었으니 농경 역시 발달했을 터이고, 그래서 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 아닐까 싶다. 크레타의 미술작품에서는 분명 이집트의 영향이 보이는데, 그럼에도 훨씬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유럽 예술의 양대 근원이라고 하는 이집트와 그리스 예술을 크레타가 다리 놓고 있는 것만 같다.
(TMI) 구글 검색을 해봤을 때, 크레타 문명과 관련해서 아이들과 갈 만한 관광지로는 제우스 동굴 옆 Greek Mythology thematic park와 하니아 시내의 Minoan's World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 신화 테마파크는 그리스 신화를 디오라마로 만들어놓아 야옹님 구미에 딱 맞을 것 같았으나 방문 전 연락이 잘 안 되어 가보지 못했다. 우리가 이미 하니아로 떠난 후 영업한다고 메일이 왔으니 상시 영업을 하는 것 같다). Minoan's World는 크레타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를 4D로 상영하는 곳인데, 기술 수준은 조잡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야옹님이 좋아해서 만족했다. 상영관 밖에는 조그맣게 크레타와 관련된 트릭아트를 꾸며놓아 사진 찍기에 괜찮다.
크레타는 중세 이후의 복잡한 역사만큼 여러 문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베네치안 항구와 옛 모스크(현재는 다른 용도로 쓰이지만),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 공존한다.
크레타를 검색하면 노란 톤의 항구 사진을 볼 수 있다. 베네치아의 통치를 4백 년 겪었던 크레타에는 베네치아 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이라클리오에도 하니아에도 레팀노에도 모두 '베네치안 항구'가 있다. 우리 가족은 하니아 올드타운에서 베네치아 항구와 성벽 주변을 산책했는데, 잠시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렀던 레팀노에서도 비슷한 유적을 볼 수 있었다.
항구마다 건설된 성벽은 오스만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건설했을 테니, 지중해 가운데 있는 이 섬의 복잡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문명의 교차로이기에 일찌감치 미노아 문명이 발전했지만, 힘이 없으면 한없이 취약한 곳. 베네치아 지배 기간에 크레타에도 르네상스가 꽃피었다고 하지만(알고 보니 엘 그레코가 크레타 출생), 베네치아가 다른 식민지의 경우 자치를 인정했던 것과 달리 크레타에는 직접 관리를 파견했고 봉기도 상당기간 있었다고 하니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아름다운 항구의 풍경도 꽤나 복잡한 역사를 품고 있는 셈이다. 이후 크레타의 지배권이 오스만으로 넘어갈 때도 무려 21년에 이르는 칸디아(현 이라클리오) 공성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라클리오 외에도 크레타 섬 곳곳의 성벽은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기간 이 섬의 고단함을 갈무리하고 있으리라.
오스만은 '세금을 내면' 개종을 강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관료로 등용을 해주었기에 면세와 출세를 위해 개종한 도시지역 인구가 많다고 하지만(비율은 통계마다 다르던데, 내가 본 것 중에서는 나무위키에서 본 1821년 49%가 가장 높은 수치인 듯하다) 기독교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당시만 해도 상당히 관용적이었던 셈이다. 일등 신민과 이등 신민의 구분은 있어도(여기에 이미 갈등이 축적되어 있었겠지만) 유혈사태 없이 여러 종교가 공존하던 크레타에서도 19세기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민족 간, 종교 간 갈등이 고조된다. 아르카디 수도원은 그리스 본토의 독립 후에도 식민지로 남아있던 크레타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킨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 수도원에서 오스만의 탄압에 항거하던 수도사, 주민, 독립군이 화약고를 폭파시켜 오스만 군과 함께 전사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모바일 한경 http://plus.hankyung.com/apps/newsinside.view?aid=2018091689821&category=travel&sns=y 참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운전 문제와 이동경로 상 아르카디 수도원은 가지 못했고, 하니아 숙소 근처의 Holy Trinity (Agia Triada) Tzagaroli Monastery를 다녀왔다. 아르카디 수도원과 같은 역사적 의미는 적지만 이콘(성화)을 제외하면 비교적 소박하고 고요한 분위기, 수도원 담장 밖 밭으로 나가는 길에 놓여있던 농기구가 인상적이었다. 수도사의 방으로 보이는 곳들은 밖에서 볼 때 작고 검박해 보였으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자하리아스처럼 그 안에 뭐가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긴 하다.
(TMI) 레팀노는 조금 더 럭셔리한 휴양지 분위기이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아르카디 수도원도 레팀노에서 가깝다. 이라클리오와 하니아가 항공편 및 페리를 이용하기 좋지만 레팀노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TMI) 우리의 야옹님은 수도원에서 고양이 친구들과 놀며 즐거워했다. 그리스는, 특히 크레타는 길냥이 천국이다. 길냥이에게 사료를 주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기념품 가게에서 '크레타의 길냥이들'이라는 엽서집을 파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정리하다 보니 크레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만일 좋은 기회가 생겨서 크레타에 다시 가게 된다면 야옹님의 반대로 못 갔던 달팽이 농장(그때는 달팽이 먹는 걸 결사반대했던 야옹님이지만 프랑스에서 달팽이의 맛에 빠져버렸다)도 가고, 한 곳에서 오래 묵으면서 사람 냄새를 더 맡는 여행을 하고 싶다. 크레타는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조르바의 고향이기에, 아마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마다 크레타가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