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테네의 흔적을 찾아서 - 아크로폴리스
야옹님은 그리스로 출발한 날 만 8세가 되었다. 진짜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지녀서인지, 아니면 고양이 나이로 50대에 접어들어서인지 틈만 나면 "호텔 가자"를 부르짖으신다. 야옹님 탓만 하기에는 나 역시 만성적 야근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혼술로 다진 저질 체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본전 생각을 싹 지우고 코스를 느슨하게 짤 수밖에 없었다.
유적과 박물관을 얼마나 꼼꼼하게 살펴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건강한 10대~40대라면 이틀 정도로 아테네의 주요 명소를 훑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제약이 있는 우리는 항상 가고 싶은 곳의 반 이하로 일정을 줄여야 한다. 가령 고대 유적지 통합 입장권(30유로)을 구입하면 5일 간 7개 유적지에 입장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크로폴리스와 고대 아고라만 들어가고, 제우스 신전과 로만 아고라는 밖에서만 보고 지나갔다. 사실 아테네 유적지가 대부분 터나 골격의 일부만 남아있어, 역사나 건축에 깊은 조예가 있지 않다면 모든 곳을 안 가도 되는 측면도 있다.
* 참고로 비수기 때는 개별 유적지 입장료가 할인되니 통합 입장권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
Mets 지역의 숙소에서 출발한 지 5분 여만에 하드리아누스의 개선문과 제우스 신전이 나왔다. 그리스 빠돌이에 방랑자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흔적을 여기서 드디어 만났다 (영국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하드리아누스 방벽 가보기인데 정작 영국 유적지는 아직 못 갔다). 아크로폴리스 쪽 사이드에는 '테세우스의 땅'이라고, 제우스 신전을 향한 반대쪽에는 '하드리아누스의 땅'이라고 표기해둔 것에서 감상적인 그리스광의 감성과 함께 황금기에 대제국을 경영한 황제다운 거만한 포부가 양면적으로 느껴진다.
제우스 신전은 BC 6세기에 건축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기둥의 코린트 양식을 볼 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완성한(여기까지는 팩트) 정도가 아니라 상당 부분 건설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이건 순전한 나의 추측). 16개의 기둥만 남아있어도 제우스 신전 사진이 아테네의 상징처럼 여기저기 쓰이는데, 104개의 기둥이 있던 때의 위용은 어땠을까. 체력을 아끼기 위해 밖에서 전체적인 모습만 봤지만, 안까지 들어가면 직접 걸으면서 그 규모를 체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아테네 여행의 이유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크로폴리스. 사실 높다고 해도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완만한 길을 가면 되니 건강한 성인으로 구성된 그룹이라면 힘든 길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야옹님을 모셔야 하니 갖은 회유(슬러시 사주기 등)는 필수였다. 제우스 신전 쪽에서 올라가다 보면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도 볼 수 있다. 여러 변수를 고려해서 가이드 없이 다녔던 우리는 짧은 지식과 추리를 동원해서 아테네 시민들은 저녁마다 여기에서 공연을 봤을 거라는 둥(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공연을 봤겠지만), 그러다 전쟁이 있으면 저 돌산 위 아크로폴리스에서 도시를 지켰을 거라는 둥, 아치 양식을 쓴 걸 보더라도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로마시대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는 둥 야옹님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으며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체력이 된다면 디오니소스 극장도 가까우니 같이 볼 수 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에서는 아직도 공연을 한다. 남편이 예전에 갔을 때 첫 5분 좋다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고문이었다고 해서 이번엔 생략했지만, 지중해성 기후와 공간의 역사성이 함께 하는 공연을 본다면 매우 특별한 경험일 것 같다.
막상 올라가서 눈으로 보는 아크로폴리스는 마음이 아프다. 그리스 유적이 대부분 그렇듯이 '여기에 있었다'가 대부분이니, 남은 자리는 우리의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페리클레스가 동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델로스 동맹의 기금을 쏟아부어서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한 것을 생각하면, 이후 파르테논 신전이 기독교 교회나 모스크로 쓰였을 뿐 아니라 탄약고로 쓰이다 반파되고, 엘긴에게 조각품까지 ('합법적으로') 갈취당하는 수난을 당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는 시대별 아크로폴리스의 모습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완성된 모습의 모형을 보면서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의 영화를 떠올려볼 뿐이다.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소녀상 여섯 개 중 다섯 개의 진품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하나는 물론 영국박물관에 있다). 현재 파르테논 신전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 옛날 파르테논 신전 건축에 15년 여가 소요되었다는데, 14년 전 이 자리에 있었던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복원 공사 진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복원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건축 속도나 복원 속도나 놀라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백이 주는 울림이 있다. 런던이나 파리의 꽉 채워진 공간과 대조되는 아크로폴리스의 여백을 자신의 상상으로 채우면서, 유럽인들은 그들 문명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잔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아크로폴리스에서 아테네를 내려다보고, 일직선이 없는 파르테논의 건축 흔적을 꼼꼼하게 뜯어보기도 하면서. 규모나 명성에서는 비교가 안 되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켄터베리에는 영국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진 상징인 성 어거스틴 수도원이 있다. 폐허에 가까운 유적(영국의 어느 가톨릭 할머니는 'brutal 하게 파괴되었다'며 분개했다)을 어느 영국인 노부부가 꼼꼼하게 짚어보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신전 복원이 늦어지는 것이 그리스 행정의 단면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광화문처럼 너무 신속하고 멀끔하게 복원해놓으면 이런 감흥은 없을지도 모른다.
야옹님은 그리스 로마 신화 애호가지만 막상 신화의 현장에 가서는 예쁜 돌 찾기에 골몰하셨다 - 생각해보니 옥스퍼드 자연사박물관에서도 다른 기념품 제쳐두고 손톱만 한 로즈쿼츠를 사 온 분이긴 하다. 이 모습을 보고 "이 지역에 돌이 많기 때문에 이런 신전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해준 남편의 노력이 가상하다.
식도락 편에서 아크로폴리스 야경과 함께 호사스러운 저녁식사를 했던 바로 그곳이다. 현재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신관은 영국이 가져간 파르테논 마블(소위 엘긴 마블)을 돌려받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실제 영국과 프랑스는 다른 국가의 문화재 관리 능력을 이유로 여러 문화재의 반환을 거부하고 있고, 그리스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신관을 개관한 후에는 '영국박물관에서 인류 문명을 통합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데 그리스로 반환하면 그게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여전히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엘긴이 마블을 영국으로 가져올 당시 오스만 투르크가 그리스 유적을 훼손시키고 반출을 나 몰라라 했던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리스에 감정 이입이 되는 부분이다. 이 박물관 제일 위층 파르테논 갤러리에는 돌아와야 할 파르테논 마블의 자리를 비워놓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야옹님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마지막층을 보지 못하고 급히 나가야 했다).
박물관 입장권은 따로 구입해야 하지만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 와볼 만한 곳이다. 크노소스 궁전도 그렇지만 그리스 유적이 워낙 고대의 '터'라서 박물관에 와야 그 터를 채우고 있었던 소프트웨어가 보완이 되는 측면도 있다. 2009년에 개관한 새 건물이라 그런지 전시관은 쾌적한 편이다. 주요 전시물 앞에서는 박물관에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독립 전의 긴 암흑기와도 같은 그리스 역사나 2008년 이후 침체된 그리스 경제를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지는 광경이었다. 박물관 지하에는 고대 유적지가 남아있다. 이 유적 위에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쟁 때문에 신관 건설이 늦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가까이 내려가 볼 수 있으니 고대의 집 터를 따라 잠시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그리스의 이미지가 어린이들에게 신화라면, 성인들에게는 역시 민주주의와 서양 철학의 뿌리 아닐까. 그래서 아크로폴리스보다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고대 아고라를 꼭 가고 싶었다. 다행히 아크로폴리스 방문 다음날, 야옹님께 점심으로 초밥을,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접대(?)하고 고대 아고라까지 가볼 수 있었다.
고대 아고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이것을 보기 위해 아테네에 왔다'는 것이었다. 아테네 신전 중에서 가장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헤파이스토스 신전과, 복원해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탈로스 스토아를 제외하면 고대 아고라 역시 돌무더기만 남아있는데 왜 이곳이 좋았는지는 모르겠다. 당대의 지성들이 이곳에서 토론을 하고 학문을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막연한 동경 때문일 수도, 멀리 보이는 아크로폴리스를 배경으로 인간이 발 딛고 살아갔던 장소에 대한 상상 때문일 수도, 붐비는 토요일의 신타그마 광장과 먹자골목을 지나온 후 비교적 호젓하게 우리 시간을 가진 덕분일 수도 있겠다. 둘러보다 보면 구역마다 하나씩의 건물은 복원해두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헤파이스토스 신전의 보존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은 아테네의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큰 희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테네의 쨍한 햇살과 약간의 바람을 벗 삼아 여백이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장소의 가치는 충분하다. 체력적인 여유가 있다면 아탈로스 스토아도 가보면 좋았을 것 같다.
근대 문명의 화려함을 고스란히 자랑하는 유럽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아테네는 소위 '볼 것'이 제한되어 있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여행지이다. 이를테면 런던이나 파리는 일주일을 있어도 갈 곳이 계속 나오지만, 아테네는 앞서 말했듯 성인 여행자끼리만 다니면 이틀 정도면 주요 명소를 대부분 가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유산을 꽉꽉 채워 자랑하는 도시를 갔을 때 오랜만에 만난 잘 나가는 친구나 셀럽을 만난 것처럼 재미있지만 피로함이 느껴진다면, 고대의 영화와 쇠락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테네는 남아있는 약간의 욕망을 잘 누른 채 소박하게 지내는,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애써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잘 나갔던 시절도 힘들었던 시절도 굳이 말로 꺼내지 않고 가식 없이, 그저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 되는 그런 친구 말이다. 물론 현대 그리스의 정치를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고 아테네의 곳곳에는 경제위기 이후 팍팍함이 묻어나는 현장이 많지만 (마치 오랜 친구의 꼰대같은 면을 문득문득 발견하게 되듯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많은 곳을 가보는 것보다 천천히 공기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아테네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