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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너머 Apr 22. 2022

2022.4월 야옹 생일에 떠난 그리스 여행기 3

식도락

영국 생활에서 불만족스러운 점 중 음식을 빼놓을 수가 없다. 다행히 마트에 파는 식재료가 다양하기 때문에 해 먹기는 나쁘지 않지만 외식은 대체로 비싸거나 맛없거나 양이 적거나 셋 중의 하나이다. 오죽하면 우리가 스페인 마요르카를 갔을 때 어쩌다 점심은 영국 버거킹에서, 저녁은 스페인 버거킹에서 먹었는데 똑같은 와퍼인데도 스페인 게 훨씬 맛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에서 음식을 기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스의 음식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4일 이상 여행하면서 김치 생각을 안 한 곳은 일본과 그리스 밖에 없었다. 일단 소싯적에는 혼자서 회 1kg를 먹어치웠던 해산물 러버인 나에게 해산물이 풍부한 그리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 스페인 요리가 맛있지만 짜서 한국인 입맛에 좀 안 맞을 수 있는 것과 달리 그리스 요리는 간이 맞았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재료로 뭐하러 과한 요리를 해?"라고 한다는 말도 있던데, 유럽을 아직 4개국밖에 안 가봤지만 그리스 요리가 가장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아마 한국에서 바로 왔으면 이 정도로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텐데, 반년 간의 영국 생활로 내 맘 속에서 그리스 음식은 제2의 소울푸드쯤이 되어버렸다.


촘촘하게 계획을 짜서 다닌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밥 먹어야 할 때 근처에서 대충 찾아가서 먹었다. 구글 평점 4.2 이상인 곳들은 다 성공했고 유일하게 어쩔 수 없이 먹었던 4.0 안 되는 곳 하나만 실패했다. 무서운 구글 평점.


그리 요리


처음 간 곳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근처 대로변 식당이었는데, 위치가 위치라 그리스 음식 치고는 살짝 가격대가 있었다. 무사카(라자냐 비슷한 요리)가 10유로 (싼 곳은 절반~2/3 가격, 비싼 곳은 12~13유로). 하지만 요리 세 접시, 페타브레드 2인분, 차지키(요구르트를 이용한 그리스 소스)를 더해도 40유로가 안 되었으니 영국은 물론이고 마요르카보다도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다 (물론 스페인 본토는 마요르카보다 훨씬 저렴하다고 한다). 차지키에는 오이, 허브, 식초 등이 들어가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큼한 맛이었고 빵이랑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고기 요리를 먹을 때 느끼함을 잡아주었다. 새우요리는 사가나키(Saganaki)인데 토마토소스와 페타치즈의 꼬릿함이 잘 어울린 야옹님의 최애 요리였다. 무사카는 생각할 수 있는 맛이었고, 나와 남편이 맛있게 먹은 것은 바로 장어요리였는데, 장어와 렌틸콩(아마도?)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아래 사진은 몇 점 먹고 나서 야옹님이 찍은 것.  

  


아테네 여행 중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레스토랑에서 야경을 보며 하는 저녁식사이다. 물론 메인 메뉴가 17유로 전후로 그리스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아크로폴리스 야경을 정통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한국이든 영국이든 이 가격에 이런 곳에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을까? 자리가 없을까 걱정했지만 늦은 시간에 가서 그런지 야외 자리가 아주 한산했고 실내에서는 멋지게 차려입은 그룹이 모임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20시에 닫지만 금요일 토요일에 연장영업을 하는데, 사람이 적은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우리가 좀 늦게(20시 넘어서) 가기도 했고 가격대도 있고, 다른 아크로폴리스 뷰 볼 수 있는 식당도 있는데 여기는 박물관이라 입장 시 방역 통제도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차마 "너네 사람 왜 이거밖에 없어?" 하고 묻지는 못했다). 아무튼 사람 많은 것을 싫어하는 우리는 매우 쾌적하게 아크로폴리스 야경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메뉴는 한정적이었지만 맛은 무난하게 괜찮았고 바스에 딸려 나온 돌마네스(우리나라 연잎밥과 비슷.  포도잎으로 쌀, 고기 등을 싸서 찐 요리)가 맛있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먹은 돌마네스 생각에 마트 통조림도 사보았으나... 통조림 돌마네스는 절대 비추한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아크로폴리스를 보고 있자니 고대에도 밤에 아크로폴리스에서 횃불을 밝혀 주변 도시 국가들에게 위용을 자랑했을지, 내 지식 범위를 넘어서는 의문이 생겼다. 모르긴 몰라도 아테네 시민들이 극장 공연을 즐겼으니 비슷한 뷰가 연출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야경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박물관 레스토랑은 구글평점 4.2였지만 영국이었다면 최소 4.5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날 점심은 도보여행에 지친 야옹님을 달래기 위해 길가다 발견한 한식당에 충동적으로 들어갔다. 본래는 고대 아고라 뒤쪽 먹자골목에서 먹으려 했으나 막상 점심을 먹고 가보니 너무나 붐비는 곳이었기에, 거기까지 가서 요일 점심을 먹었으면 우리 가족은 스트레스를 꽤나 받았을 듯하다. 한식당은 Ikura라는 곳이었는데 밖에서 처음 볼 때는 초밥 사진이 붙어있어 일식당인가 했더니 그리스 온 지 30년 된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곳이었다. 야옹님은 초밥을 너무너무 사랑하시는지라 26.5유로짜리 초밥세트를 시켰는데,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양이 적고 비싸지만 영국에서 초밥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경험한 우리에게 "이게 초밥이지"를 외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젊은 그리스 손님들도 꽤 보였는데, 사장님께서 한국말을 코칭해주고 계셨다.



야간 페리에도 식당이 있다. 주차 후 위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밤바다를 볼 수 있는 스낵바가 나오기 때문에 크레타로 갈 때는 여기서 먹는 실수를 했는데, 알고 보니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도 옆에 있어서 본토로 돌아갈 때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가격은 합리적인 수준인데, 다만 빵을 기본으로 주고 1인당 2.5유로씩을 받았다. 어쩐지 빵 구성이 너무 좋은데 그냥 주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계산서에 떡하니 적혀있는 7.5유로. 그리스에서는 이런 곳들이 가끔 있었다. 스낵바 직원이 불친절했던 것과 달리 레스토랑 웨이터는 위트 있고 친절했다. 남편이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려 했는데 자기들은 없다고 스낵바에 알아봐 주기도 하고, 결국 거기도 없다는 걸 설명하면서 아이가 직접 메뉴 확인을 원하면 그렇게 해주겠다고까지 했다. 야옹님이 의젓하게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하길래 괜찮다고 사양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지 야옹님에게 "너는 messy한 우리 애들과 달리 엄청 의젓하다"라고 해서 야옹님 콧대를 높여주기도 했다. 옆자리 아이가 유리잔을 깨서 비교한 것 같기도 한데, 사실 엄마 한 명이 아이 넷을 데리고 다니는 게 내 입장에선 더 존경스러운 일이었지만. 여담이지만 그리스에서는 다둥이로 추정되는 가족이 종종 보인다.

(좌) 페리 스낵바 (우) 기본으로 깔고 돈을 받는 레스토랑 식전빵

유럽은 종교색이 확실하고 그리스도 예외가 아니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비수기 일요일에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분명 관광지이고 구글에는 버젓이 영업을 하는 것으로 적혀있는데도 찾아가 보면 안 하는 곳이 허다하다. 아마 아테네라면 그래도 하는 곳들이 꽤 있었겠으나 휴양의 섬 크레타에서는 아직도 비수기였던 것이다. 어쩌면 부활절 기간이라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일요일 아침 일찍 페리를 내려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을 보고 나와 배가 고픈 우리는 썰렁한 식당가를 마주했다. 맛집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다 허탕을 친 후, 문을 연 서너 군데 중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남편이 많이 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알고 보니 구글 평점 4점이 안 되는 곳이었다. 사실 입구에서부터 뜨내기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 터미널 식당의 느낌이 물씬 풍기긴 했다. 실패하지 않을 메뉴들로 시켰는데 역시나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오징어가 놀랍게도 부드러워서 그리스는 그리스네 싶었다.



크노소스 궁전까지 주마간산으로 섭렵한 우리는 이제 크레타의 자연과 함께 숙소에서 본격적인 뒹굴거림을 만끽하려고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이게 웬 말, 일요일이라 마트도 대부분 영업을 안 했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부질없이 아름다운 해변가의 썰렁한 식당가를 걸어가던 우리. 다행히 문을 연 빵집에서 빵이나 사 먹자 하던 터에 마지막 희망을 안고 전방으로 파견 갔던 남편이 문 연 식당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딜 봐도 좀 비싼(아테네 관광지 식당과 비슷한 가격) 관광지 식당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문 연 식당인 와중에 구글 평점도 좋았다. 그리스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수블라키(꼬치)와 함께 생선요리와 돼지고기 구이를 주문했다. 결과는 성공. 야옹님 생일을 낀 여행이기도 했기에 이번엔 아이스크림을 꽤 자주 사줬는데, 아이스크림이 5유로나 되길래 눈물을 머금고 사줬더니 4~5 스쿱 정도가 들어가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드디어 말로만 듣던 그리스 식당의 서비스를 처음으로 받았다. 라키 한 병과 디저트. 식사 중에 라키 시켜서 마셨는데 아까워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아테네를 벗어난 식당에서는 대부분 식사가 끝나면 디저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맛있었지만, 그리고 이 시기에 다시 그리스를 오기는 어렵겠지만 4월 초 크레타의 일요일을 나려면 미리 장을 봐 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월요일에 드디어 장을 보고 숙소에서 빈둥거리기에 성공한 우리는 2~3일 간 식비를 좀 아끼며 살다가 하니아 시내에서 다시 외식을 해금했다.

사진의 일부를 오린 거라서 각도와 화질이 엉망이지만 아무튼 이런 숙소를 두고 나가서 먹는 것도 사치이다.

하니아 올드타운은 스탈리다의 한산한 일요일과 대조적으로 북적이고(물론 평일이었다) 식당에서 호객까지 하는, 우리로 치자면 횟집타운 같은 동네였다. 입간판의 해산물 세트를 보고 식당을 고른 우리는 이로(Gyro; 그리스의 도너 케밥으로, 꼬챙이에 고깃덩어리를 끼워 빙글빙글 돌려 구운 후 얇게 저며 먹는 요리. Gyro는 돌린다는 뜻)도 같이 주문했다. 대식가인 우리 식구도 너무 배가 불러서 다 못 먹을 양이었는데, 2/3쯤 먹은 이후엔 맛있어서 의무감에, 또는 영국에 돌아가면 못 먹는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먹었는데도 결국 약간은 남겼다. 오징어는 당연히 부드럽고 문어구이는 겉은 불맛이 나는데 안은 살살 녹는 맛이었다. 나도 문어 손질을 해봤지만 도대체 어떻게 손질을 해서 구워야 이런 맛이 나는 걸까. 두 종류의 생선 튀김도 맛있었고, 느끼할 수 있는 이로도 차지키랑 먹으면 맛의 중심이 딱 잡혔다. 샐러드는 식전에 나온 것인데, 서비스인지 해물 세트에 딸려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여기도 크레타 답게 라키와 디저트가 서비스로 나왔다. 해물 세트가 28유로였는데, 그리스에서 한 번은 먹어볼 만한 메뉴이다.


이번 여행에서 현지스러운 체험을 많이 못했던 나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준 곳은 레팀노의 가정식 식당이었다. 레팀노는 밥만 먹기 위해서 들렀는데 'Maria's home cooking' 팻말을 보자마자 이끌린 듯 들어갔다. 아마 식당 주인분 성함이 상호에 나오는 마리아일 것 같은데, 가정식이라 메뉴가 없는 곳이었다. 딱 봐도 메뉴를 설명해줘도 모를 것 같은 검은 머리 세 명을 보더니 주방에서 냄비 안의 요리를 보여주며 설명해주고 고르라고 했다. 거의 1인분씩만 남아있었기에 네 가지 요리 중 세 가지(미트볼, 비프스튜, 콩 수프)를 골랐는데, 파스타와 밥이 정말 수북하게 나왔다. 주인장께서 미트볼은 남은 게 1인분 조금 안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용도로 만들어둔 큰 덩이 하나를 더 넣어주었다. 어느 나라든 가정식은 그리운 맛이 느껴진다. 심지어 내가 그 문화를 잘 모르더라도. 그리고 솜씨도 있는 집이어서 비프스튜는 레시피를 알고 싶었고 분명 특이한 향신료 맛이 났는데도 거슬리지 않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들어가 있었다. 괜찮았냐고 물어보길래 비프스튜가 맛있고 야옹님이 미트볼을 좋아했다고 하니, 아이들은 다 (아마도 마리아의) 미트볼을 너무 좋아한다고 한다.


여기서도 역시 사진이 흔들려서 아쉽지만 21파운드의 행복한 가정식 점심식사

대망의 마지막 식당은 피레우스 항구에서 평점이 좋은 곳을 찾아갔다. '떠나기 전 배 터지게 해산물을 포식하자' 콘셉트로 모두가 좋아했던 문어, 야옹님이 좋아하는 새우 사가나키, 약간의 도전정신으로 생선 수프를 주문했고 결국 와인을 홀짝대다가 오징어 먹물 리조토까지 추가 주문해버렸다. 마요르카에서 나는 나름 맛있게 먹었던 오징어 먹물 빠에야가 짜다며 다소 불만이었던 남편의 평은 "그리스 게 더 맛있다". 마요르카는 빠에야를 대부분 2인분 단위로만 판다는 걸 생각하면 여기서는 1인분 주문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생선 수프는 해산물 애호가인 내 생각에도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은 맛인데, 나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리스에 더 대중적으로 맛있는 요리는 많다.




유럽 사람들은 반주가 생활화되어있고, 마찬가지로 그리스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술이다. 실제 우리가 갔던 곳들 대부분이 'taverna'였는데 구글링 해보면 콜린스 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a small, inexpensive tavern or restaurant in Greece, often with music and dancing'.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판타지 게임을 해보면 'tavern'이 술집으로 번역되듯, 가볍게 술을 곁들여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대중식당이다. 마지막 식당에서 내가 맥주 마시게(결국 고른 건 와인이었지만) 드링크 메뉴를 달라고 하니 유쾌한 식당 주인장 왈 "너는 나보다 더 그리스 사람 같아"란다. 아무래도 이 분이 한국인의 주류 사랑을 잘 모르셨던 모양이지만 유럽 사람들은 낮술도 많이 마시니, 음주 빈도 면에서는 우리보다 한 술 더 뜰지도 모른다. 남편이 옛날 그리스를 다녀와서 계속하던 말이 그리스에서는 와인을 피쳐로 놓고 마신다는 거라서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터라, 화이트 와인 1리터를 주문했는데 아쉽게도(?) 500밀리리터 물병 두 개에 나왔다. 어려운 그리스어가 생산자명이라는 걸 보면 가게에서 주조하는 것은 아니고 통 단위로 사서 파는 모양이다. 맛은 깔끔한 편이라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마시기 좋았다. 비슷하게 그리스 마트에도 2유로 안쪽의 저렴한 화이트 와인을 팔고 있는데 풍미는 약하지만 부담 없이 요리에 쓰거나 곁들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우리를 사로잡았던 그리스 술은 우조였다. 우조는 크레타에서 마신 라키와 비슷한 술이다. 라키는 와인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증류해서 만든 술인데, 아니스가 들어가기도 한다. 우조도 와인 제조 후 남은 포도 찌꺼기로 만들고 아니스가 들어간다. 둘 다 아니스가 들어간다고 하니 헷갈리는데 (둘 다 물을 섞으면 하얗게 변하는데 이게 아니스 때문이라고 한다), 어디서 본 설명으로는 크레타 라키는 아니스 향이 강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실제 우리가 마셨던 라키는 다 아니스 향이 거의 없었고 직선적인 증류주 맛이었다. 우조는 아테네 숙소에서 마리아나가 냉장고 안에 준비해두어서 처음 마셨는데, 아니스 향이 매우 강해서 상쾌하고 깔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전혀 취향에 안 맞을 수 있는 맛이다. 내 생각엔 콤콤한 페타 치즈가 들어가는 사가나키나 고기 요리와의 궁합이 괜찮다. 우리 부부는 우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마지막에 면세점에서 1리터짜리 두 병을 사들고 왔다. 원료가 저렴해서인지 가격도 1리터 한 병에 12유로이고, 현지에서는 소주병 반 정도 되는 조그만 병으로도 많이 판다.

 

로컬 맥주도 있고 나쁘지 않다. 에일맥주의 팬인 나로서는 맥주만큼은 영국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라키와 우조는 독주이기에 맥주도 가끔 마셨다.


마트와 B&B


그리스에서 마트 장을 두 번 봤는데, 한 번은 유럽 어디에나 있는 저가 슈퍼마켓 체인 리들이었고 한 번은 그리스 로컬 슈퍼마켓이었다. 뜨내기라 그런지 몰라도 체감 상 그리스의 마트 물가가 영국보다 엄청나게 싸지는 않았다(물론 영국 마트가 한국 마트보다는 평균적으로 좀 더 싸다). 특히 영국도 마찬가지지만, 리들에 비해 로컬 슈퍼체인은 조금 더 가격대가 있기도 했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은 주부들이라면 외식의 가성비가 높으니 외식을 위주로 해도 될 것 같다.


좋은 점도 많았다. 해산물 선택폭이 넓고(섬나라인데도 해물 가게 찾기 어려운 영국과 달리 마을 가운데 해물 가게가 종종 보인다), 생선 비늘을 안 치고 팔아서 나를 패닉에 빠지게 한 영국과 달리 생선 비늘이 잘 손질되어 있어서 여행지에서도 생선 한 마리를 통째 구워 먹는 호사를 누렸다. 문어 한 마리를 통째 냉동해서 10유로 조금 넘는 가격에 파는 것을 보고 바로 장바구니에 담고 싶었지만 무나 밀가루가 없으니 문어 손질할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던 것은 좀 아쉽다. 햇살이 좋으니 과일이 신선하고, 스페인에도 있다고 하는 오렌지주스를 바로 짜 먹는 기계가 마트에 비치되어 있기도 했다. 다만 스페인에서 먹으면 오렌지 본연의 단맛이 폭발한다는데, 그리스 리들은 저렴한 오렌지를 쓰는지 맛은 그냥 그랬지만 가성비는 좋았다. 영국 돼지고기는 왜인지 냄새가 잘 안 빠지는데, 돼지고기를 막 구워도 맛있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과자. 그리스는 각종 견과류는 물론이고 깨를 과자에 많이 사용한다. 참깨스틱도 저렴하고 맛있고, 무엇보다 깨나 견과류를 꿀로 굳혀서 만든 과자가 있는데 우리나라 강정과 상당히 비슷하다. 가격도 저렴해서 여행 다니는 내내 배고프면 애용했고, 처음 리들에서 더 많이 사 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공항에도 선물용 과자를 팔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싸니 그리스 마트에 들리면 과자는 가벼운 선물을 겸해서 여유 있게 사도 좋을 것 같다.


로컬슈퍼마켓의 과자 코너, 리들의 깨강정, 리들의 오렌지주스 기계

 

우리는 그리스에서 모두 아파트형 숙소를 이용했는데, 놀랍게도 네 군데의 숙소 모두 식용유와 소금이 비치되어 있었고 후추도 대부분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콘도 가서 요리할 때 가장 난감한 것이 식용유가 없어서 계란 프라이 하나 하기 어렵다는 것 아닌가. 최소 1주일 이상 묵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주방도구도 잘 갖추어져 있고 정말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커피를 사랑하는 그리스 답게 모든 숙소에 커피 머신과 커피가 있었다 (두 군데는 네스프레소 머신도 있었다).


영국에서 돌밥돌밥을 하다 보니 먹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는 평점이 어지간히 되는 Taverna를 들어가면 햇살을 즐기며 흡족하게 요리와 술을 즐길 수 있다. 한동안 해산물이 비싼 영국에서 돌밥돌밥을 하며, 그리스 음식 앓이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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