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성당은 헨리 8세 이후 가톨릭에서 성공회 성당으로 바뀌어, 현재는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총본산 역할을 하고 있다. 종교도시 캔터베리의 모습을 대변하듯, 캔터베리 곳곳에는 대성당과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성 마틴 교회 외에도 성 던스턴 교회(St Dunstan's Church), 성 스티븐 교회(St Stephen's Church), 성 피터 교회(St Peter's Church), 성 밀드레드 교회(St Mildred's Church) 등 그 유래가 800년 이상된 교회가 곳곳에 있다. 이 교회들 역시 현재는 성공회 교회이다.
캔터베리 시내에도 그만큼 오래된 건물이 즐비하다. 1500년대 튜더 건물부터 1800년대 빅토리아 건물까지 다양한 시기의 고풍스러운 건물에 은행, 햄버거 가게, 커피숍 등이 입점해있다. 한때 롤플레잉 게임을 좋아하던 나는, 처음 캔터베리에 왔을 때 펍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험가들이 에일을 들이켜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아래 사진에 나오는 The Old Weavers' house의 경우엔 1500년에 지어졌다고 하지만, 건물 토대는 1200년대 것이라고 한다 (출처: http://www.dover-kent.com/Old-Weavers-House-Canterbury.html). 당초 직조공들이 사용하다가, 캔터베리 직조 산업이 쇠퇴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어 지금은 펍이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 바깥에 보이는 나무의자(Ducking stool)는 마녀 재판에 쓰였다는 괴담이 전해져서 핼러윈 시티투어 레퍼토리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마녀 혐의를 받는 사람을 이 의자에 묶은 후 물에 빠뜨려 떠오르면 유죄, 가라앉으면 무죄로 판명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어이없는) 마녀재판 방식은 캔터베리가 위치한 잉글랜드 남부가 아니라 북부에서 행해졌고, The Old Weavers' house에 있는 것은 훨씬 나중인 빅토리아 또는 에드워드 시대의 모사품이라고 한다 (출처: https://blogs.canterbury.ac.uk/kenthistory/ducking-stools/). 그렇다고 캔터베리에서 마녀재판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각설하고, 100년 전 사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시내의 모습은 처음에 얘기한 '아기자기한 캔터베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얼마 전에 캔터베리에서는 지역 축제 Medieval Pageant가 열렸다. 말을 탄 기사를 필두로 중세시대를 모티브로 한 퍼레이드뿐 아니라, 시내 곳곳의 교회ㆍ박물관ㆍ공원 등을 활용하여 가족 단위로 즐길 수 있는 행사였다. 평소에는 입장료를 받는 곳이나 코로나 이후 운영을 중단했던 곳도 무료로 개방해서 다섯 곳 이상을 방문하면 대성당에서 코인 초콜릿을 주었고, 방문한 곳에서는 중세시대 물감으로 그림 그리기, 밀랍 인장 찍기, 중세 자수 놓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어 아이와 함께 토요일 하루를 즐겁게 누빌 수 있었다. 한 곳 한 곳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꽤 공들여 준비한 행사라는 생각이 들어, 관광객뿐 아니라 캔터베리 주민 입장에서도 도시에 대한 애정이 조금 더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매년 7월 초에 하니 (코로나로 2020년에는 건너뛰고 2021년에는 10월에 퍼레이드만 한 것 같다) 내년에도 기회가 되면 아이와 함께 올해 못 가본 곳들을 가볼까 한다.
그렇다고 캔터베리가 마냥 경건하고 고루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 세 개의 대학이 있기 때문에 나름의 젊은 문화와 다양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작년 10월 말 대성당 합창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한 시간 반 동안 너무나 Holy한 나머지 잠이 쏟아지는 공연을 주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멋지게 차려입고 정자세로 관람하고 계셨더랬다. 그런데 대성당을 나가는 그 순간, 각양각색의 핼러윈 분장을 하고 펍을 드나드는 20대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60년 된 우리 동네에도 small talk을 할 때는 세상 친절하지만 차가 쌩하고 지나가면 "어떤 운전자들은 이 동네에는 사람이 안 사는 줄 아나 봐"라고 불평하는 할머니와, 축구를 볼 때면 옆집이 떠나가라 응원과 욕을 하는 대학생들이 공존한다 (사실 할머니들은 동네의 대학생 집들을 은근 안 좋아한다. 뜨내기에 잔디를 잘 안 깎는 우리 집도 그중 하나일 수 있겠지만 모른 척하고 지낸다).
Medieval Pageant가 진행되는 그날에도 시내 악기점에서는 밴드가 록을 연주하고 (올해 재개한 글래스턴베리 중계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Brit Rock은 저물어가도 그 향유층은 살아있다), 시내에 나가면 거의 항상 버스커를 볼 수 있다. 다만 어두운 면도 있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의외로 대마초 흡연자가 많고 그 영향으로 대마초를 피는 10대들도 있다고 한다. 물론 영국에서도 대마초 흡연은 불법이다.
켄트주의 해안가 도시에 비하면 인종도 다양한 편이다. 동양인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너무 백인만 있어도 초기 적응이나 왕따 걱정이 생기는데, 캔터베리 소재 초등학교에는 대체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이들의 비중이 20~50% 정도 된다. 영국은 미국처럼 체계적인 초등학교 ESL 프로그램은 없는 것 같지만, 야옹님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경우 비영어권 학생들 대상으로 보조 교사가 특별수업을 일부 운영해서 초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 동네처럼 오래된 곳들은 학생을 빼면 검은 머리 찾기가 어렵지만, 약간 외곽에 새로 지은 깔끔한 집들은 인도ㆍ파키스탄계 인텔리들이나 네팔계 은퇴 용병이 집주인인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의외로 캔터베리는 켄트주의 주도도 아니고 (주도는 메이드스톤) 인구도 10만에 못 미치다 보니, 대도시에 비하면 '심심한 시골'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위드 코로나가 선언된 이후 런던에서는 주말에 가족 단위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 골라야 할 지경인 것 같은데, 캔터베리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한다 (물론 주위 다른 곳들로 눈을 돌리면 갈 곳은 얼마든지 있는데, 어떻게든 동네에서 뭔가 해보려고 할 때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군 단위 규모라는 점을 고려하면 꽤 괜찮은 인프라가 있다. 영국에서는 주로 중고제품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본 적은 없지만 작은 백화점(Fenwick)과 쇼핑가도 있고, 심지어 롤렉스 매장도 있는 것을 보면 소비층이 탄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영국에 와서만이 아니라 한국에 있을 때도 백화점은 안 갈 만큼 쇼핑에 무지한 나로서는 지역 박물관과 공연장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캔터베리 지역 박물관이자, 갤러리, 도서관, 관광정보센터를 겸하고 있는 The Beaney House는 고풍스러운 외관만큼 재미있는 공간이다. 캔터베리 태생의 의사로 호주에 가서 성공한 Dr James George Beaney가 자신과 같이 가난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달라고 캔터베리에 기부하였는데, 그의 이름에서 건물 명칭도 따왔다고 한다 (출처: https://canterburymuseums.co.uk/the-beaney/about-the-beaney/). 캔터베리 역사나 문화와 관련된 작품들부터,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은 취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유행했던 부호들의 수집품을 기부받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를테면 아주 조그만 고양이 미라 같은 것들이 있다)이 있어서 아이들과 둘러보기 좋다. 야옹님이 영국에 도착한 직후 재미있게 참여했던 Spider Stories 행사는 박물관 곳곳을 탐험할 수 있게 유도할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문화를 맛볼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런 행사들은 아이 엄마 입장에서 고마울 따름이다. 어느 날은 특별전을 하고 있길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마티스의 그림이 떡 하고 나를 반겨주기도 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도서관에서 야옹님을 위해 한 시간 동안 소소한 과학 실험을 신청해서 하고 왔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수준이긴 했지만 야옹님은 영국에 온 후 처음으로 과학 실험을 했다며 좋아했다 (최근 영국 공립학교의 열악한 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캔터베리의 종합 공연장인 The Marlowe Theatre에서는 연중 클래식, 뮤지컬, 연극, 팝 공연이 있다. 작년에 뮤지컬 Jamie를 보러 갔었는데 (한국에도 최근 수입되어 조권이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드랙퀸이 되고자 하는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다소 B급스러운 이야기인데도 낮 공연 좌석은 빽빽하게 채워져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모두 웃고 손뼉 치며 보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마 지금 영국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중 상당수가 68세대일 테니, 노인이라고 해서 틀에 박힌 이미지를 가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맘마미아ㆍ드림걸즈ㆍ레미제라블과 같이 잘 알려진 뮤지컬 공연도 주기적으로 상연되는데, 아무리 캔터베리에서 런던이 가깝다고 해도 런던까지 가는 시간과 경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인구 10만이 안 되지만 이들이 늘 문화생활을 즐기기에 한국 대도시 수준의 공연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캔터베리 중앙을 River Stour가 가로지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江'이 아니라 '川'이 붙어야 할 규모지만 로마 시대에는 운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깊이가 얕다 보니, 긴 막대로 바닥을 밀며 배를 움직이는 펀팅(Punting)이 캔터베리에서도 주요 관광상품 중 하나이다. 그룹으로 캔터베리 설명과 함께 시내 투어를 하는 펀팅 상품과 4인 이하 개인 단위로 살짝 외곽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펀팅 상품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두 번째 방식의 펀팅을 해보았다. 꽤 비싸긴 했지만, 40분 간 명상하듯 피로가 씻겨나가는 경험이었다. 뱃사공 청년과 이런저런 잡담도 좀 했으니 영어수업도 겸한 셈 치면 될 것 같다 (어차피 영국에서는 외식을 안 하고 돌밥돌밥 중이니까).
결론적으로 캔터베리는 관광객 입장에서 하루 이틀이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인구 규모에 비해 역사와 문화가 함께 하기에 소확행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소도시들이 많은 것이 영국의 소프트파워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 소도시들도 내실 있는 콘텐츠가 축적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