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지구에서 잠시 엿본 카탈루냐의 멍울
카탈루냐 광장 옆 상점가들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큰 성당 옆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한창인 분위기 속에 감추어진 바르셀로나의 모습은 어떨까? 잠시 머물며 껍데기만 보고 가는 여행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닐 터이다. 그래도 숙소가 카탈루냐 광장에서 고딕지구로 접어드는 곳에 있어, 구시가지를 걸으며 잠시라도 생각해볼 계기가 있었다. 물론 요즘은 고딕지구 자체가 투어 코스가 되어있는 만큼, 이 역시 그냥 여행자의 껍데기 감상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고딕지구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키스의 벽'을 마주할 수 있다. 카탈루냐어 제목인 El món neix en cada besada는 영어로 번역하면 'The world is born in each kiss'가 된다. 언뜻 보면 그저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한 이 벽은 가까이에서 보면 카탈루냐 독립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벽이 제작된 것은 20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후 카탈루냐가 자치권을 박탈당한 1714년으로부터 3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벽을 만들기 위하여 '자유로운 삶'을 주제로 사진을 공모하였고, 시민들이 기부한 4천 장의 사진은 모자이크가 되었다. 당시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모자이크 옆에는 '키스 소리는 대포처럼 귀를 찢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 여운은 훨씬 오래간다 (The noise of a kiss is not as deafening as that of a cannon, but its echo is more lasting)'는 글귀가 쓰여있다고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s.wikipedia.org/wiki/El_mundo_nace_en_cada_beso). 조용하고 흔들림 없이 자유를 원하는 이 갈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Catalan_independence_movement) 민족주의의 흐름과 함께 필연적으로 찾아왔다고 봐야겠지만, 프랑코 독재정권의 탄압이 없었더라도 분리주의가 이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바르셀로나 고딕지구의 산 펠립 네리 광장은 가우디가 매일 왔던 산 펠립 네리 교회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1938년 이 광장에 프랑코와 동맹관계였던 무솔리니의 폭격이 가해졌으며, 당시 공화정부 영향권에 있던 산 펠립 네리 교회에는 아이들이 피난 와 있었기에 20여 명의 아이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한다. 이 공간을 말살해버리려는 폭격으로 인해 당시 남은 것은 포탄 흔적이 선연한 교회 파사드 밖에 없었다고 (출처: 산 펠립 네리 광장 설명문 - 아래 사진 참조). 포탄이 교회에 남긴 상흔은 아직 그대로 남겨두고 있어, 그 참혹함을 상상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스페인 내전 후 프랑코 정권이 36년 간 지속되었고 수십만의 스페인인이 희생당했으니, 스페인 현대사도 참 굴곡진 역사이다.
바르셀로나 골목을 걷다 보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란 리본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우리와 같은 의미는 아니고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하고, 독립운동으로 수감된 정치인들을 석방해달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과 산 펠립 네리 성당에서 느낀 아픔으로 카탈루냐 독립운동의 맥락이 일부 이해되기에, 그리고 노란 리본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가 있기에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노란 리본은 아릿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제적 동기가 종종 지적되는 것을 보면 분리주의를 얼마나 순수하게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니, 애초에 의도가 순수한 분리주의라면 괜찮은지도 수많은 논쟁이 가능한 부분이다).
다만 감정적인 갈등의 골이 표층으로 드러나는 시기, 갈등을 넘어서려면 가까이 가서 꼬인 실타래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용두사미 감상과 함께 짧은 고딕지구 산책을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