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 과외를 하고 있던 때였다. 말이 과외지 난 그저 옆에서 그 아이의 중간고사, 기말고사 준비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끔은 떡볶이도 같이 시켜먹으며 그렇게 조금은 친구처럼 언니처럼 다가가서인지 그 아이는 나에게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도 잘 조잘댔다.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아이는 연필꽂이 가득 꽂혀있는 연필, 볼펜, 지우개 등을 보고 말했다. "이것들 언제 다 써서 없어질까요? 진짜 안 없어져요." 그러는 거다. 내가 "그럼 안 쓰는 건 그냥 버리면 안 돼?" 했더니 "안돼요. 다 써서 없앨 거예요." 했다. 더 묻지 않았다. 나도 그 마음이 뭔지 알기 때문에. 하나씩 다 써서 없앨 때의 쾌감. 정말 작지만 확실한 뿌듯함이다. 별 것 아니지만 멀쩡한 걸 버리면 죄책감이 든다. 아직 충분히 제 기능을 할 수 있는데 조금 짧아졌다고, 낡고 싫증 났다고 함부로 연필을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 그 아이의 마음에 나는 공감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연필의 수명은 자꾸 늘어난다. 그 존재의 끈질김에 때로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아이의 마음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써도 써도 없어지지 않는 연필이나 지우개는 계륵이다. 쳐다보고 있으면 자꾸 신경 쓰이고 버리고 싶지만 버리자니 아깝고 왠지 양심상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서 갈등하게 된다. 묵은 것을 시원하게 다 갖다 버리고 새것으로 장만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 하지만 다 써서 없애겠다고 선언을 한다는 건 그동안 꽤나 마음속에서 갈등을 했지만 결국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쳐다보고 왜 안 없어지냐고 나에게 한탄한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산 연필이 몇십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너무나 새것 같은 모양으로 어디선가 나타날 때, 약간 소름이 끼쳤던 적이 있다. 늙는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었다. 물건이 나보다 오래 살 것 같을 때. 우주의 탄생 어쩌고 할 때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과 공간의 단위를 들을 때, 옛날에 만들어진 물건이나 건물들이 아직 너무나 쌩쌩할 때, 몇백 년을 살아온 나무에 대해 들을 때, 좋아하던 연예인이 나이가 든 것을 볼 때, 그리고 그 연예인이 나와 비슷한 또래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죽음을 의식한다. 옛날 사진 속 젊은 부모님의 모습이 현재 모습과 비교될 때.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으면서 시간을 멈추고 싶어 진다. 나보다 짧은 생을 사는 생물들을 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 느껴진다. 그것들의 인생과 비교하면 나는 길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대적인 감각이 나보다 훨씬 수명이 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고 그러면 나는 다시 보잘것없는 짧은 생을 사는 생물이 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만큼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때가 있었던가. 이 아이를 두고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자라게 될까? 내가 몇 년 동안 이 아이 옆에 있어줄 수 있을까?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몇 살인가 계산해보고 이 아이가 몇 살 때 내가 죽게 될까? 혹시 아이가 나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까? 그러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지금도 소멸되어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시간에 대한 감각이 바뀌어갔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시간을 쓰는 것에 아까움이 없었다. 하루는 별로 한 것 없이 후딱 지나갔고 이만하면 시간 잘 보냈다 하고 안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야말로 시간 죽이기를 한 날도 여럿이었다. 듣지도 않을 음악을 가득 다운로드하고 다운로드한 걸 또 cd로 굽고 또 그걸 진열하고 정리하다가 결국엔 듣지도 않은 채 cd의 세대가 끝나버렸다. 좋은 걸 저장해놓고 두고두고 즐기려는 마음이 이렇게 어리석은 결과를 맺을 줄은 몰랐다. 무료 ebook 사이트를 발견하고 새벽까지 읽지도 못할 만큼 저장을 했다. 그 ebook 중 읽은 것은 한 권도 없다. 책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책을 사는 것을 읽는 것과 동일시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때 그냥 음반 하나라도 제대로 듣고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여러 가지 활동들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오늘 하루 하늘을 올려다보고 산책을 하는 것보다 소중한가.
너무 이상적인 기준을 바라보며 살면 죽을 때까지 그곳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한다. 그럴 때 내 삶은 항상 무언가가 부족한, 미완성인 상태가 된다. 그러니 한 번이라도 지금 여기에서 느껴보고 가져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
내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것도 이 '죽음에 대한 인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같은 말들. 모두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보면 죽기 전에 해보아야 할 100가지 것들, 들어야 할 100장의 앨범,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여행지 100곳 등이 넘쳐난다.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아주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죽음을 의식하고 있다면 왜 지금 하지 않을까?
욜로족의 마인드는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지출을 하는 경우다. 하지만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진리 아닌가? 어차피 지금 누리지 못하면 나중에도 누리지 못한다. 지금 자신에게 짜게 구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아진다. 아이가 생기는 것도 삶의 정말 큰 변화중 하나다.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갈 곳도 못 갈 곳이 되고 할 수 있는 일이 하면 안 되는 일이 된다. 내가 롱보드를 고이 모셔만 놓고 있는 이유이다.
퇴직 후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계획했는가? 그때가 되면 그 일은 할 수 없거나 할 가치가 없어지거나 하기 싫어질 가능성이 크다. 버킷리스트, 위시리스트에만 저장해놓고 하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죽기 전을 아주 먼 미래로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지금 하지 않는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보자.
그렇다고 초조해할 것까지는 없다. 초조함은 현재마저 즐길 수 없도록 만든다. 내가 하는 일이 즐겁지만 시간 낭비라고 생각될 때는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자. 그것은 미래의 어떤 가치이기보다 현재의 기분, 감정 등이면 좋을 것 같다. 결국은 이러한 기분 좋은 순간이 모여 내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까.
미래의 어떤 것을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면 그 미래는 영영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현재의 쾌락만 생각한다면 머지않아 인생이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다.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그림이 있는가? 탁월한 것을 이루기 위해선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한다. 이 말은 과연 옳은 말일까? 미래의 무엇을 위해 지금 내가 하는 노력이 단지 희생이라고만 느껴진다면, 미래의 누군가가 와서 빚쟁이처럼 현재의 나에게서 어떠한 것을 선수 쳐서 가져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하는 노력의 방향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엄청난 노력이 없이 값진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내 삶을 소진시키는 무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망상병 환자가 되지는 말자. 내가 열정을 쏟고 있는 일이 나중에 내 삶에서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판명 났을 때에도 지금 하는 일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겠느냐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내가 직장생활이란 보람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곳에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일이었다고 평가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영어 표현 중에 'Down to earth'라는 것이 있다. 실제적인, 현실적인, 분별 있는 등등의 뜻이다.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영화에 이 표현이 나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을 보며 현실에 굳건하게 서있는 사람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지 느꼈다. 나는 그다음부터 이 표현을 들을 때 사람이 땅에 다리를 붙이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이상을 품되 현재 내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며 현재에 굳게 발을 디디고 있는 모습이다. 미래엔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다는 환상만 부풀리는 것은 스스로를 최면에 거는 것과 같고 그런 식으로는 후회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오랜 숙제 같은 소원이 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보자. 그것이 물꼬를 터서 더 많은 좋은 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