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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06. 2023

외로움과의 고독한 싸움

EP.7-2 외로움과의 고독한 싸움


친일과 반일이라는 단어가 있다. 과거부터 일본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두 간극 사이를 많은 사람이 오갔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에 들어서서 ‘극일’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다. 정서적 부분을 넘어서서 ‘일본을 이기자’라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진 프로파간다였다. 단순히 일본을 적이나 친구의 개념으로 두지 않고 한국만의 정체성을 강화해서 일본을 이기겠다는 뜻이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식민지 시절의 굴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입장을 최대한 잘 반영한 사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앞에 두고 있던 나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필요한 정신 무장이었다. 아참, 그렇다고 내가 전두환 정권을 옹호한다는 건 아니다.


많은 이들 사이에서 나를 오롯하게 혼자 같이 느끼는 삶을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외로움은 언제나 내게서 떨쳐내야 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외로움을 떨쳐내야만 하는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외로워지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햇빛이 들지 않는 반지하방에서 더 심해졌고, 이후 수유로 적을 옮겨 조그마한 방에서 팬데믹 시대를 견뎌내고 있던 나에게서 더욱 크게 발현됐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방패를 꺼내 들었지만, 오히려 이 방패가 사회적 고립이라는 창으로 바뀌어서 사람들을 찔러대는 때였다. 나 역시 이 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경제적 활동은 하고 있었다만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1인 가구였던 나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환경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아주 제대로 체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로움을 단순히 체념하는 감정이나 떨쳐내야 하는 감정으로 마주한다는 건 껄끄러운 일이었다. 원래 지독한 사채업자들은 도망치려 할 때 더욱 집요하게 채무자를 쫓아오는 법 아니겠나. 그래서 나는 이때 ‘극일’의 정신을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바로 ‘외로움을 이겨내자’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생기는 딜레마가 바로 ‘혼자=외로움’이라는 불문율의 법칙이었다. 혼자 있는 상황이 곧 외로운 것인데, 어떻게 외로움을 이겨낸다는 것인가가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일을 마치고 혼자서 외로움의 무거움을 받쳐 들고 있을 때, 끝없는 사색에 빠졌다. 고행을 마치고 비로소 목욕을 한 뒤 보리수 주변에서 7주를 지내며 사색을 했던 싯다르타의 마음으로 나는 외로움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때의 외로움이란 내게 곧 싯다르타의 수행을 방해했던 마신 ‘마라 파피야스’였다.


어느날 조계사에서 찍었던 사진, 싯다르타 얘기가 나와서 써본다.


외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사색을 하면서 내가 집중했던 감정은 외로움, 두려움, 불안이었다. 따지고 보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출발해 나머지 두 가지 감정까지 사색하게 된 과정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먼저 상정한 질문은 ‘외로움은 어디서 오는가’였다. 그래서 그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했다. 나는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부모님과 자주를 통화를 했으며, 친구들과 매일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이것은 사회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방을 두르고 있는 콘크리트 벽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사회와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내게 외로움이란 정서적인 고립이 아닌 육체적인 고립으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이었다는 것으로 논리적 해석을 시도했다. 그렇게 되니 ‘극복할 수 있는 건 내가 이 집에서 나가서 어쨌든 누군가와 면대면으로 이야기를 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렀다. 젠장, 이건 내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함정이 있었다. 나는 사회 속에 있을 때도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나. 그랬다. 이 외로움은 물리적인 거리로 인한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오고 있었다. 거기서 확장해 나간 감정에 대한 사색이 바로 두려움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립감을 느낀 이유는 내가 가진 ‘다소 비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쉽게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쉽게 공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볼까 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오롯하게 나라는 사람을 보여줬을 때 사람들에게서 “저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했던 것. 이러한 두려움은 더욱더 사람들 속에서 ‘진짜 나’를 숨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건 나라는 존재의 필연적인 외로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커진 것이 ‘불안’이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불변의 생각은 ‘나라는 인간’은 너무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불안감을 느낀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한 번의 선택으로 다섯 가지의 가능성이 열리는 결과 값이 나온다고 할 때, 선택지가 다섯 개나 있으면 그 결과 값은 스물다섯 가지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선택을 해야 하는 나는 이 한 번의 선택으로 갈라질 스물다섯 가지의 가능성을 계속 훑어보게 되고,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스무 가지의 가능성까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는 꼴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이 막연한 가능성의 두려움이 ‘불안’으로 발현되는 형상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불안은 이런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비관적인 상상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다수였다.


그리고 이게 내 ‘외로움’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바로 언젠가 사회에서 진짜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 ‘혼자’ 그걸 전전긍긍 고민하고 있는 것. 바로 지금 이 방에서 이 사색의 결과를 도출해 내고 이 과정이 내 ‘외로움’의 실체였다. 이건 완전 영화 <식스센스> 버금가는 반전서사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내 꼴이란 단순히 살이 찢어진 것일 뿐인 환부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어디가 진짜 아픈 곳인가를 찾으면서 환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돌팔이 의사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전혀 아니었다. 나는 이 사색을 통해서 환부를 망치고 있던 것이 아닌, 아주 정밀하게 내 안에서 자라고 있던 ‘외로움’이라는 암세포의 근원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전에 반전을 가하니 막장드라마 서사라고 비판해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주의 : 사람이 외로움과 불안,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세계 인구의 수대로 표현하자면 80억 가지가 넘게 각양각색이므로, 내 생각의 결과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나의 경우’라는 걸 꼭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보리수 사진은 없어, 한강 사진으로 대체해본다.


가능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자세


최고의 치료는 ‘수많은 두려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상상의 거세’였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아주 기막힌 상상력을 가지고 자란 나에게 그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혼자 사색을 그만두는 것도 불가능이었다. 젠장, 난 평생 그러면 이 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때 다시 한번 ‘극일’을 떠올렸다. 획기적인 사고방식의 전환. 기막힌 상상력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내게 가장 어울리는 수술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수많은 두려운 가능성에 대한 불안함을 수많은 긍정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으로 바꿔놓는 굉장히 까다롭고도 실패 위험성이 큰 수술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보리수 아래에서 눈을 떴다. 나는 이 기간을 지나면서 내가 아닌 타인을 바라볼 때나,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긍정적인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이 중점을 두려고 했다. 물론, 그 희망에 대한 경계도 필요했으나 내가 느끼는 궁극적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쨌든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려 했다. 그 결과로써 희망이 꺾이게 되었을 때, 큰 아픔을 겪는 고통도 수반됐으나 좀 더 사소한 행복으로 일상을 채우는 힘을 얻었다고 확신한다. 모든 자세란 일장일단이 있지만 이러한 사고의 회로를 바꾸는 게 내게는 장점이 더 컸다. 


당연히 지금도 외로움을 느끼고는 한다.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을 때, 문득 찾아오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걸 끌어안고 뒤척이기보다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조심히 가세요.”라고 쉽게 극복할 수 있게 됐다. 어쨌든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면 내가 가장 잘 조절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불경스럽게 내가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 못 한다. 희망의 가능성에는 결국 나 자신이 언젠가는 또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가능성도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고? 여전히 이 사색과의 고독한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는 거다. 언제까지 혼자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에게 아예 문을 열어주지 않을 만큼의 단단함이 생길 때까지, 내 이 고독한 싸움은 멈추지 않을 예정이니깐.


※ 매주 수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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