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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Sep 13. 2023

특명, 월세를 깎아라

EP.8-1 특명, 월세를 깎아라


팬데믹 시대에도 이사는 다녀야 했다. 외로움과의 싸움을 마치고 나니 이제 또 방 구하기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2020년 8월이 수유에 위치한 방의 계약만료였기에 나는 어디로 또 거처를 옮겨야 할까 고민했다. 물론, 집을 옮기지 않아도 됐지만 내가 대체로 업무상 다니는 곳들이 여의도나 강남에 밀집해 있던 탓에 수유에서 이동을 하기란, 꽤 벅찬 일이었다. 게다가 월세를 5만 원 더 올려야겠다는 집주인의 요구도 있었다.


사실 수유의 집에 머문 이유도 서울에서 딱 1년만 더 버텨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이직을 하게 되면서 아예 서울에 정착할 마음이 커진 것도 있었다.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는 영화연출의 꿈보다는 ‘글쓰기가 더 내게 적성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나만의 글쓰기로 서울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매일 글쓰기 작업에 돌입했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실정이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는 하루 종일 기사를 쓰고 난 뒤에, 또 집에서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고는 한다. 사실 기사로 글쓰기와 소설로서 글쓰기, 에세이로서의 글쓰기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일단 기사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쓰기 때문에, 그렇게 글을 쓰더라도 뭔가 내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감정의 배설을 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에세이를 쓰면 어느 정도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감정들을 배출해 낼 수 있는데, 이것이 난 창작욕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창작욕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는 반면에, 내게 에세이는 꾹 눌러왔던 감정이나 단상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배설하는 것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것 역시 인간이 예술을 하는 이유라고 하는데, 거창하게 ‘나는 예술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럽다. 그래서 창작욕구가 마구 솟아오를 때는 짧게 단편소설을 쓰거나 하는데 이게 좋은 소설이라고는 생각 안 해도, 뭔가 ‘이야기’라는 것을 만들어내면 개비스콘을 한 박스 정도 속에 들이부은 것처럼 속이 편안해진다.


어쨌든 이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던 2020년 7월의 무더운 여름, 나는 좀 더 쾌적한 환경을 갖춘 집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수유의 집이 보증금 300만 원에 55만 원으로 계약을 하고 있었는데, 5만 원을 올린 60만 원에 굳이 이 4평 남짓의 좁은 집을 고집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창밖에서 나는 쓰레기 냄새에도 이골이 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강남과 여의도, 회사가 위치한 광화문 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좁은 집이 아닌 어떻게든 내가 공간을 꾸밀 수 있는 넓이의 집이 필요했다. 그렇게 여러 군데를 서치 하다가 찾은 곳은 젠장, 신림 밖에 없었다.


집을 구하기 위해 참 많은 골목을 돌아다녔다.


인생은 삼고초려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원룸을 구하려다가 현실의 냉혹함을 깨닫게 해 준 곳이 신도림이었다. 이후 신림의 방들도 둘러봤던 기억이 있지만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신촌에서 처음 서울생활을 시작했고, 수유의 원룸으로 적을 옮기기 전에도 신림에서 방을 구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실패였다. 이유는 명백했다. 근처에 너무 유흥주점이나 유흥업소들이 많았고, 생각보다 좋은 컨디션의 집이 없었다. 물론 신축들의 경우, 깔끔했지만 너무 방이 좁았다. 건축법상 다세대주택은 4층 이하로만 지을 수 있어, 그 안에서 최대한 방을 쪼개는 것이 건물주들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 같은 세입자 입장에서는 4평도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1년 동안 머무르다 보니, 좁은 집에서 사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좁은 방은 청소하기에는 수월해도 공간을 꾸미기에는 너무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렇게 앞서 두 차례나 고배를 마시고도 나는 다시 집을 구하기 위해 신림을 찾았다. 두 번의 실패 후 세 번째로 제갈공명의 집을 찾았던 유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또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에잇 될 대로 되어보라지’라는 마음이었을까. 어쨌든 신림에서 방을 구하기 위해 세 번째로 발걸음을 한 나는 후자 쪽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두 번의 집 구하기 속에서 나름 노하우도 생겼기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슴에 차 있었다.


일단 나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을 예산으로 상정했다. 그리고 무조건 방은 6평 이상으로 원했다. 원래 같았다면 다방이나 직방 같은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매물들을 뒤져봤을 텐데, 허위매물도 많거니와 사진과 다른 방도 많았기에 내 머릿속에 환상을 심어두지 않기 위해 무작정 신림에 위치한 부동산을 찾았다.


처음 만난 부동산 중개업자는 인상부터 꽤 친절했다. 게다가 요즘은 다 어차피 중개업자들끼리 쓰는 사이트에서 매물 관리가 되기 때문에, 괜히 힘 빼지 말고 컴퓨터로 구경하다가 몇 곳을 추려서 직접 찾아가 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때 느꼈다. “아, 내가 찾던 제갈공명이 여기에 계셨군요!”라는 감정을. 이 제갈공명, 아니 중개업자는 내게 약 10군데의 방을 추려 보여주면서 각 방들의 컨디션들을 설명했다. 평수가 넓은 곳으로 가려면 신축보다는 구축으로 가야 하는데 신림역 인근에 위치한 방보다는 당곡사거리 쪽이 좀 더 가격이 저렴하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어차피 곧 신림선이 개통할 것이기 때문에 개통 후에는 교통이 편할 거라고도 첨언했다. 이런 중개업자라면 나는 떴다방이라고 해도 꽤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렇게 나는 그중 다섯 군데를 선정해서 공인중개사의 차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우선 신림역에서 도보 7분 내외의 거리에 있는 두 군데의 집은 사진으로 보던 것과 꽤 차이가 있었다. 특히 한 곳은 4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오르고 내려오다가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할 것 같아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물론, 그럴 체력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다. 이후에 세 곳의 집을 더 돌아다니다가 나는 당곡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한 집을 내 차기 서울살이 거점으로 낙점했다. 집의 크기도 나쁘지 않았으며, 큰 책장이 있는 책상이 옵션으로 달려있었기에 내 수많은 책들을 꽂아두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점은 낡은 세면대, 화장실 비품들, 이리저리 시트가 벗겨진 가구들이었다. 하지만 방이 2층에 있다는 것과 건물이 2호선과 7호선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또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내 집 창문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포어 사진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이사 직후의 집 사진 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네고는 안 되겠습니까?


처음 집주인이 중개업자에게 내건 이 집의 계약 조건은 보증금 500만 원에 관리비 포함 월세 50만 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그대로 ‘오케이’라고 외쳤겠다만, 그때의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특히 집구석구석 수리해야 할 곳들이 보였기에, 이번이 처음으로 부동산을 구하면서 네고를 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십 대 초반, 몇몇 막노동 이력과 장애인복지관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면서 시설 관리를 일부 담당했던 경력이 있는 나였기에 허름한 부분은 충분히 나 혼자서 수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중개업자에게 조심스럽게 집주인과 네고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돌아온 중개업자의 대답은 “얼마나?”였다.


사실 얼마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은 너스레가 적재적소에서 발휘됐다. “수리해야 할 곳들이 있는데 이걸 그냥 제가 수리하는 걸로 하고 보증금을 100만 원 깎고 월세를 10만 원 정도 깎으면 어떨까요?”라고 얘기했다.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중개업자는 내가 말을 정정할 겨를도 없이 바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마침 집주인이 집에 있다면서 내려오겠다고 얘기했다. 우습게도 바로 위층에 집주인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집주인, 중개업자는 아주 빠르게 내가 살게 될 방 한가운데에 서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그 긴장감이란, 마치 남북미 정상회담의 공기와도 같았다.


나는 우선 수리해야 할 곳들을 이리저리 지적했다. 책상 시트지의 벗겨짐, 화장실 휴지걸이와 비누거치대가 타일에서 반쯤 튀어나온 것, 세면대 배수관 교체 등이 주요 골자였다. 창틀과 벽의 이격도 있었지만 이건 블라인드를 내리면 보이지 않을 것 같아 굳이 수리 요건에는 넣지 않았지만 네고의 조건으로는 포함시켰다. 또한 벽지도 다소 낡은 감이 있기는 했지만 벗겨짐 등은 없어서 벽지를 교체하지 않는 조건도 내걸었다. 1년 계약이었으면, 집주인도 ‘네 맘대로 그렇게 정할 거면 방 안 내주면 그만이다’라고 했을 텐데, 난 2년 계약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다른 세입자 구해서 수리를 하려고 해도 꽤 비용이 들지 않을까요?”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회심의 한 마디. “수리하고 나서 마음에 안 드시면 월세를 그대로 올리겠다”라고 말했다.


난 마치 <야인시대>에서 4달라를 외치던 김두한처럼, ‘400만 원에 40만 원’을 외쳐댔다. 집주인은 꽤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그 사이의 정적 속에서, 나는 최대한 수그러들지 않겠다는 듯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그때 집주인이 긴장감을 깨고 나에게 역제안을 걸어왔다. “보증금 300만 원에 45만 원은 어떠세요?”였다.. 그리고 수리하고 나서는 꼭 방의 상태를 보여달라고 덧붙였다. 나는 속으로 “아니, 이게 되네?”라고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너무 많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프로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두 자존심들의 싸움이 끝나는 순간, 공인중개사는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그리고 집주인과 나는 남북공동성명에 서명을 하러 가는 남북정상처럼 당당하게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향했다. 내 서울에서의 삶이 세 번째 챕터로 넘어가는 때였으며, 대대적인 셀프 집수리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순간이기도 했다.


※ 매주 수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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