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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Oct 11. 2023

서울, 이방인의 도시

EP.9 서울, 이방인의 도시

     

“말은 제주로, 사람은 한양으로”라는 옛말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수도였던 한양이 가장 인프라가 구축이 잘 되어있었기에, 한양으로 가서 출세를 하란 말이었다. 그런 흐름은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었을 때 경성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 서울로 이어졌다. 두 번이나 이름은 바뀌었지만 서울은 늘 사람이 북적였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울로 유입되면서, 행정구역도 계속해서 변해갔다. 지금으로 치면 강북의 일부 지역만 포함됐던 경성은, 서울로 이름을 바꾸면서 행정구역을 점점 넓혀나가더니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본격적으로 지금의 강남 지역까지 ‘서울특별시’라는 이름의 행정지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만큼 서울이라는 곳은 해방 이전부터 이미 인구 과포화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라는 공간이 등장하면서, 서울은 주거 인구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강남 일대의 아파트 개발을 시점으로 서울은 지방의 인구들을 수도 없이 빨아들였다.


이 지방의 인구들은 소위 ‘서울 드림’을 안고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권 대학에만 입학한다면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이라 생각하고 버스를 타고 지방에서 올라와 학력고사를 쳤고, 대학 입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일자리를 찾아 지방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특히 개발붐이 일어나고 있던 수도권에는 정말 수많은 ‘서울 드림’을 꾸면서 올라온 인물들로 득실득실했다. 이게 지금은 달라졌을까. 전혀 아니다. 


나 역시 ‘서울 드림’을 꾸면서 지방에서 올라온 수많은 이방인 중 한 명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서울권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또한 결국 문예창작학과를 가겠다는 마음으로 대구의 한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영화라는 꿈을 포기하지 못해 계속해서 서울로 눈길을 돌렸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지방에서 영화라는 꿈을 꾼다는 건 무리였다. 좋은 영화 촬영 장비를 적당한 가격에 대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단편영화를 찍으면서 돈 깨나 깨진 편에 속했다. 물론, 그렇게 돈을 들여 만든 결과물이란 지금의 내가 보기에도 너무 부끄러울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실패는 늘 씁쓸함을 안긴다.


이렇게 지방에서 꽤 고군분투하고 살다가 ‘그래, 서울로 가자’라고 마음을 먹게 된 건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접고 나서 ‘영화를 다루는 기자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늘 ‘어쩌다 서울에 올라왔다’고 말하거나 ‘어쩌다 기자가 됐다’라는 말을 하고 살지만, 실상 이 ‘어쩌다’ 속에는 수많은 내 시행착오와 고민, 선택들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지금까지 7년 차 홀로 살기 중인 상황 속에서도 수많은 고민, 선택들이 존재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한 고민, 집을 구하면서 한 선택들이 존재하지 않았나.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늘 선택의 결과를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하면서 던지는 편이었다. 물론 여기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 속에서도 치열한 고민들이 있었다. 최대한 많은 조건들을 거름망 삼아서 선택의 결과지를 거르고 걸렀고, 더 이상 답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선택지가 좁혀졌을 때만 ‘결과는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주사위를 던졌다. 처음 서울로 오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몰리고 몰려 선택지가 서울로 가서 기자를 하거나, 지방에 남아 다른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으로 좁혀졌을 때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서울행을 택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이곳에서 바삐 발을 옮긴다

나 역시 이방인이었다


앞선 1부 '서울에서의 여정'에서는 서울에 올라와 다양한 집들을 전전하면서 내렸던 수많은 선택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속에서 느낀 고루함과 비루함, 인생의 지지부진함에 대해서도 썼지만, 실상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그 생활 속에서 느낀 점들이었다. 그래서 1부에서는 내가 서울에 올라오게 되고, 지금의 삶이 만들어진 과정까지를 썼다. 이러한 서사들이 앞에 존재해야지만 내가 ‘혼자 살면서 느낀 것’들에 대해 더 잘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 내가 집이라는 곳을 소중하게 여기게 됐고, 혼자 사는 것에 대해 쓰고자 했는지는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잘 표현된 것인지는 내 선에서는 모를 문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지 않나.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기가 막힐 것 같다고 넣어둔 장치가 글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쓸데없는 사족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니 말이다.


하여튼 쓸데없이 진지한 이야기는 그만 각설하고, 내가 서울에서 떠돌아다니면서 느낀 건 ‘어디에서든 나는 이방인’이라는 감정이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같은 멋있는 감성의 감정은 아니고, 뭔가 서울에 연고도 없는 자가 떠돌아다니는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서울에서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었기에 많은 친구도 없었고, 힘들 때 술 한 잔 마시면서 기댈 수 있는 선배나 후배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다녔던 회사는 사적인 친분을 쌓을만한 분위기의 곳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건 두 명의 친구뿐이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했다. 친했던 학교 선후배들은 200km 떨어진 곳에 있었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고향에 있었다. 첫 회사라는 집단에서도 누군가와 친분을 발전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나는 '나는 서울 어디에서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 번씩 힘이 들어 누군가에게 내가 느끼는 고독함이나 불안들을 표현하고자 할 때도 쉽지 않았다. 그냥 내 입에서 ‘힘들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눈물이 툭 하고 같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에 그저 웃으며 자조 섞인 유머들만 늘어놨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내 우울을 숨기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썼다. 그러면서 나는 내 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저 ‘힘들다’라는 말 하나 정도 하기가 힘들어서 타인들에게 벽을 세웠다.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려고 하면, 일단 방어기제부터 세웠다. 이방인이었기에, 이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컸다. 그러면서 나는 계속해서 나를 정착민의 삶이 아닌 이방인의 삶으로 내몰았다. 서울에 녹아들 생각보다는 언제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회사에서의 일은 잘해나갔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끊임없는 우울의 우물을 팠다. 아무 샘도 터져 나오지 않고, 심연의 구멍만 깊어졌다.

수많은 이들이 지나쳤던 철로 위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다른 이방인의 삶을 만났다


사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지방인으로서 서울에 올라와 사는 감정을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특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느껴지는 어려움들을 말하는 부분이 더더욱 그랬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만 하더라도 어쨌든 하나의 공통분모에서 자연스럽게 동갑의 친구들이 엮이게 되니 ‘친구’라는 관계가 만들어지기 쉽지만, 정말 아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에서 친구를 사귀게 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유일하게 서울에 아는 두 명의 친구가 있었지만, 그 둘에게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다”라는 고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나랑 노는 게 지겹다는 말이야?”라는 반응으로 되돌아오게 될까 봐였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다른 약속으로 만날 수 없게 될 때면 나는 집에서 혼자 틀어박혀 있었다. 그게 편해지자 더욱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힘들어졌다. 아마 이때가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자면 내 인생의 가장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대학 후배가 서울에 올라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됐다. 그 후배 역시 지방에서 올라와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함께 서울에서 지내는 힘든 점들을 토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후배가 서울에서 느끼는 이방인의 감정에 대해서 자질구레하게 털어놨다. 그가 유일하게 이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던 건, 똑같은 처지에 있는 나라는 사람뿐이었다. 그때 나 역시 후배의 말에 지극히 공감하며 내 마음속에 있었던 고민들을 털어놨다. 우리 모두 당시에 원했던 건 진솔한 공감이었다. 위로도 필요 없었다. “나도 그래”라는 감정의 공유가 필요했다. 그리고 정말 둘의 필요가 잘 맞아떨어졌다. 이방인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그날의 우리는 빠르고 경쾌하게 서로의 술잔을 쳤고, 시원하게 목젖에 술을 부어 넣었다. 


그 시점이란 서울에서 처음으로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시점이기도 했고, 서울에서 생활한 지 1년이라는 시간을 채우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이 만남 덕분에, 나는 좀 더 많은 서울의 이방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이라면 “오늘 서울에 올라왔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멋들어진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이 경성일 때나, 경성이라는 이름을 벗어 서울이 되었을 때나 이미 나 같이 수많은 이방인들이 서울에 먼저 도착했을 터다. 그중에서는 이방인의 삶에 지쳐 다시 지방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서울 이민 1세대가 되어 서울에 정착한 이들도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거대한 도시가 완성됐고, 나 역시 도시 속 하나의 이방인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게 서울에서 정착민이 되고 싶었던 수많은 과정을 거쳐,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지게 된 나의 삶의 초상이었다. 그리고 이 삶의 초상이 내가 ‘혼자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생활하게 된 근간이었다. 


※매주 수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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