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색한 동양인 처음 보는 어학원 친구가 붙여준 별명
내가 호주에서 1년간 워킹홀리데이를 살 때, 내 머리는 금발이었다(!) ’한국에서 하기 민망한 짓은 이 나라에서 다 하고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었다. 역시 백인들 사는 나라라 그런지 마트에 형형 색깔의 머리 염색제가 많았다. 나는 거의 한주 한 번씩 머리를 파란색, 보라색, 핑크색으로 바꾸고 나타났다. (어학원 친구들은 내가 이상한 애인 줄 알았을 거야…) 그리고 같은 어학원을 다녔던 스페인 친구 페르난도는 내 머리색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밀리… 내일은 무슨 색으로 나타날 거야? 초록색?“
”ㅋㅋㅋ마트에 초록색 염색제 파나 찾아볼게“
새로운 머리색깔로 교실에 들어온 나를 보며 머리를 쥐어짜는 페르난도의 반응덕에 재미가 쏠쏠했다. 하루는 내가 염색이 다 빠진 금발머리로 등교를 했는데 페르난도가 별명을 하나 지어줬다.
“아밀리. 넌 오늘부터 ‘파인애플 레이디’야”
“엥?? 파인애플 레이디?”
”넌 평생 금발로 살아야 해. 알았지?“
”푸하하하ㅋㅋㅋㅋ“
그 뒤로 페르난도는 나를 파인애플 레이디로 불렀고, 몇 달 후 내가 머리를 흑갈색으로 덮어버렸을 때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 뒤로도 나를 파인애플 레이디라고 줄기차게 불렀다.
호주를 떠나고 페르난도를 다시 본 것은 4년이 지난 후 마드리드에서였다. 페르난도는 내가 온다고 하자 차를 가지고 나와 여행가이드를 자처했다. 100년도 넘은 스페인 전통 카페에서 추로스와 핫초코를 사주고 집에 초대해 저녁밥도 해줬다! 페르난도는 호주에서 셰프로 일했던 경력이 있어 그런지 요리솜씨가 남달랐다. 계란을 깨서 포크로 섞더니 감자를 슥슥 깎아 얇게 썰어 넣고 프라이팬에 촤라락 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반뼘 두께의 오믈렛이 완성됐다. (그리고 이게 스페인식 ‘토르티야’라는 걸 처음 배웠다.)
오믈렛을 먹으며 거실을 쓱 훑어보니 알고 보니 집이 온통 일본 기념품으로 가득했다. 벽에는 일본어로 쓰인 족자가 걸려있질 않나, 장식장에 크고 작은 일본 만화 피규어들이 한가득이었다. 그중에는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사무라이 칼도 있었다! 이게 다 뭔가 하며 장식장을 구경하다가 어디선가 낯이 익은 엽서 한 장이 보였다. 엽서에는 태극기 우표가 붙어 있었다. 그제야 내가 몇 년 전 페르난도에게 엽서를 써줬던 기억이 났다! 언제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엽서가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안방 진열장에 있다니. 밀려오는 감동에 못 이겨 오랜만에 보는 친구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고(…) 덕분에 스페인에서 특별한 에피소드를 남겨올 수 있었다. 페르난도가 한국 오면 나도 정말 정말 잘해줘야지! 하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핸드폰에 깔려있었는지도 잊고 있던 구형 메신저앱에서 알림이 와있었다. 누가 나한테 연락한 거지? 하고 열자마자 너무나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안녕 파인애플 레이디!]
세상에! 페르난도잖아?!
[잘 지냈지? 나 올 8월에 한국으로 여행 갈 거야.
서울에 살지? 구경 좀 시켜줘 하하]
메시지를 보고 나니 순식간에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구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페르난도가 스페인 구경을 시켜준 게 벌써 4년 전 일이었다. 어디부터 데려가야 하지? 종로? 강남? 을지로? 경복궁? 매운 거 잘 먹나?? 외교부 국빈을 모셔야 하는 여행가이드라도 된 것 마냥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가 한국까지 날아온다니! 한국이 어딘지는 알고 오는 건가? 북한이랑 남한 차이는 알고 있겠지? 알고 보니 서울이 일본에 있는 도시 정도로 아는 거 아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들뜬 가슴을 한풀 가라앉히며 펜을 꺼냈다. 탁상 위에 있는 달력을 넘겨 8월 페이지를 펼쳤고 숫자 옆에 큰 글씨로 메로를 남겼다.
<페르난도 한국 오는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