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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미미 Jul 24. 2022

혼자 살 땐 몰랐다, 내 짝꿍이 '요리 천재'라는 걸

[암과 함께 춤을4] 동반자 한몬의 '요리 돌봄'이 내 삶에 미친 영향

30대 암환자가 되고 나서야 제 삶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반려자의 보살핌 덕에 더 너그러워졌고, 치료 과정 중 느낀 점을 춤으로 표현하며 밝아졌고, 삶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나를 살리는 춤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삶은 다양한 역동 속에 춤을 춘다. 내가 가장 감동받은 움직임은 생활동반자 '한몬'의 손끝에서 나왔다. 그 덕에 일상의 리듬을 연주한다. 걱정 없이. 



매일 아침 일상은 몇 가지 일의 반복으로 이뤄진다. 화장실에 들른 후 주방 싱크대 위 전기포트 버튼을 눌러 물 끓이는 소리를 듣는다. 뜨거운 물에 찬 물을 섞어 조금씩 불어 마시며, 컵 바깥면으로 차가운 손가락들을 데운다. 



발바닥으로 거실 바닥이 차갑게 느껴지면 옷을 더 껴입은 후 음악을 튼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 손끝으로 원을 그리며 근막을 이완한다. 30여 분쯤 '원리츄얼'(힐링커뮤니티댄스 무브먼트)로 내 몸과 춤을 춘다. 



리츄얼을 마친 몸은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무언가를 요리할 힘은 없지만 괜찮다. 건강한 요깃거리가 이미 냉장고 안에 있다. 



다시마와 검은콩으로 직접 짠 두유, 케일과 사과와 바나나를 간 주스, 아보카도와 여러 야채를 배합한 과카몰리 등 모두 '한몬'이 미리 만들어둔 작품이다. 한몬의 예술품을 즐기기 위해 나 역시 움직이게 된다. 계란을 삶거나, 밥을 푸거나, 빵을 자른다.



항암 약물 주사 치료를 받던 때와 비교하면 에너지 넘치는 일상이다. 미리 마트에 들러 동물복지 달걀을 찾고, 쌀에 잡곡과 검은콩을 섞어 씻고, 비건 빵을 파는 20여 분 거리 가게는 가끔은 걸어 다녀온다.



노동이자, 활동이자, 예술인 돌봄 

▲ "한몬"이 요리한 오리엔탈 상추 샐러드에 곁들인 삶은계란 한몬이 미리 만들어둔 샐러드에 계란을 삶아 아침으로 먹었다


식사 후 별다른 일정이 없는 날은 햇볕을 쬐러 나간다. 집 뒤편 봉우리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집 아래 상점가로 연결되는 내리막길 중 발 닿는 대로 걷는다. 봉우리 끝 도서관이나 마트 앞 단골 카페에서 쉬면서 앞으로의 삶을 궁리한다. 



20대 중반과 달리 미래가 걱정스럽진 않다. 배가 고프면 집에 가서 '한몬'이 만들어 둔 반찬과 밥을 먹으면 된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얻고, 주변에 나누는 일도 물 흐르듯 이어지리라 예감한다. 



예전처럼 손해 보고 싶지 않아 어떤 길도 선택하기를 주저하는 습관과는 거리 두는 중이다. 움직일 힘이 없다면 손가락춤을 추고, 손가락마저 구부러지지 않는다면 손톱 춤을 추면 된다.


'춤의학교'(힐링커뮤니티댄스 연구소)에 가는 날은 점심 도시락을 챙긴다. 당일 아침 요리한 뜨끈한 연어찜이나 두부면 토마토파스타를 담을 때는 깊고 넓은 보온 통을 챙긴다. 전날 미리 만든 바지락 육수 카레나 토마토 계란 피자를 챙길 때는 넓적하고 각 있는 플라스틱 통을 준비한다. 역시 '한몬'의 작품이다.



건강한 식재료를 주문하고, 유튜브 요리 영상을 학습하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그는 철저하리만큼 내게 입맛 잃을 틈을 주지 않는다. 그의 돌봄은 다층적이다. 노동이자 활동이자 예술이다. 


                     

▲ "한몬이 만든 토마토 계란 새우 볶음  "춤의학교"에 가는 주말 아침에 요리한 토마토 계란 새우 볶음을 춤벗들과 함께 먹는 점심상에 공개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권세가들은 뛰어난 요리사를 자신 곁에 두는 게 중요했다고 한다. '한몬' 덕에 그 왕들이 부럽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권력과 돈이 없음에도 반려자가 있다는 것. 그가 요리를 일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중병에서 회복 중인 동반자가 춤을 추러 다닐 때 도시락을 싸준다는 것.



물론 처음부터 그가 이 모든 일을 작정한 것은 아니다. 그의 돌봄이 노동이자 활동이자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발현하는 성자에게는 그 기적의 현장에 함께 할 관찰자가 필요하다. '한몬'이 요리를 시작하면 나는 신성한 관찰자로서 그의 옆에 선다. 재료를 요리로 변형시키는 일은 매번 보는 일이지만, 매번 존경스럽다. 



그의 어깻죽지가 조리대 위에서 연분홍색 연어를 토막 내며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인다. 프라이팬을 잡은 그의 손목이 흔들거리며 연어 기름으로 양파와 대파를 볶는다. 식탁 위 올라온 그의 손가락이 잡곡밥을 손바닥에 펼친 후 볶은 연어와 야채를 올린다. 



꽉꽉 채운 속 덕분에 주먹밥 겉면이 씰룩씰룩 입을 벌린다. 손가락이 누르면 주먹밥이 출렁이고, 나는 웃음이 터진다. 웃음이라는 음악이 배경에 깔리고, 그의 손길이 춤을 추고, 나는 다시 입 안의 느낌에 어깨를 들썩거린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춘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요리의 즐거움을

내가 춤의 세계로 입문하기까지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했던 것처럼, '한몬'의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공간이 핵심이었다. 살던 집을 떠나 서울로 일하러 온 청년이 머물던 원룸은, 대부분의 방들이 그러하듯 요리를 시도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원룸에 걸맞은 작은 냉장고는 남은 식재료와 음식을 보관하기 적합하지 않다. 냉장고에 걸맞게 작디작은 싱크대 안에는 그릇 몇 개만 내려놔도 탑이 쌓인다. 분리되지 않은 부엌에서 흐르는 냄새는 옷장 안 수납 공간에 들어가지 못한 행거 위 옷들에 자리 잡는다.  



뭐든지 익숙해지려면 시도해 보는 용기와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정책은 청년들이 직접 밥 해 먹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독립했거나 독립적인 청년들이, 자신만의 공간에서, 생명에게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를 만드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니.



물론 몇 년 전부터 청년지원센터나 정책이 자리 잡으면서, 지자체마다 청년들에게 공유 부엌을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들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공유 부엌에서 밥을 먹는 일은 관계를 전제한다. 그곳까지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 낯선 이들과 요리해서 함께 먹을 체력도 남아 있어야 한다. 



청년 대상 공유 부엌 정책은 매우 혁신적이지만, '한몬'은 한 번도 그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했다. 일단 동마다 지근거리에 있는 노인정과 달리, 그의 거주 지역구에는 공유 부엌을 운영하는 청년센터가 딱 한 곳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에, 야근이 잦은 그가 공유 부엌 프로그램 날짜와 시간을 맞춰 방문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얼마나 요리에 능력 있는 사람인지 알기 전까지, 꽤 많은 시간 동안 배달 음식을 주식 삼으며 보내야 했다. 요리에 도전하고, 요리를 즐기고, 동반자와 친구들에게 요리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이라면 아주 기본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능력을.



자기만의 '춤', 그리고 그걸 알아봐 줄 '누군가'

몇 가지 우연이 겹쳐 함께 살기로 결정한 후 우리는 방과 분리된 부엌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의 첫 집은 비록 버스정류장에서 10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는 봉우리 밑에 있지만, 이전 집에 비하면 부엌만큼은 쉐프급이다. 



부엌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사이 세 군데 빈 공간이 있다. 한 곳엔 다양한 양념통을, 한 곳엔 정수기와 전기포트를 두었다. 나머지 한 곳은 조리공간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한몬'의 수많은 역작들이 준비 단계를 밟았다. 



요리 초반에는 따라 하기 쉬운 유튜브 채널, 대표적으로 요리연구가 백종원씨의 레시피를 따라 했다. 올리브 오일 파스타와 레어 스테이크, 떡볶이와 각종 볶음밥 등. 가끔 '한몬'이 고향 집에서 먹거나 명절마다 가족들이 함께 만든 음식도 재현했다. 감자전, 동태전, 육전, 새우전 등등. 



나의 암 진단 이후 '한몬'은 건강식 채널을 즐겨본다. 최소한의 조미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거나, 건강한 식재료가 조화로운 음식을 만든다. 특히 요즘에는 육고기 대신 물고기를 활용한다. 연어 타르타르, 연어찜, 연어 간장조림, 연어 계란 장, 대구 찜, 대구 간장 조림, 황태채 무침 등등.



그의 요리 레퍼토리가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우리의 선후배,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게 됐다. 수육과 오코노미야키, 우육탕면이 가장 자주 나눈 음식이다. 재료와 요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고, 함께 음식을 먹는 기쁨과 감동을 나눈다.                      

▲ 함께 만든 주먹밥 누구나 "춤"이 있고, 그 "춤"을 알아봐줄 "누군가"가 있을테니. 춤과 같은 이 요리는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몰입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에 감동받는 일, 예술의 본질이자 내가 춤추며 느끼는 일이다. 언젠가 그와 함께 힐링커뮤니티댄스를 즐기는 날을 꿈 꾸지만, 그날이 오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춤' 추고 있으니까.



누구나 자기만의 '춤'이 있으니까, 누군가는 그 '춤'을 알아봐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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