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 함께 춤을5] 벌레, 개미, 말... 작은 삶에서 깨달은 것
30대 암환자가 되고 나서야 제 삶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반려자의 보살핌 덕에 더 너그러워졌고, 치료 과정 중 느낀 점을 춤으로 표현하며 밝아졌고, 삶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나를 살리는 춤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엄지발톱 옆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빨간색 모나미 볼펜을 누군가 풀밭에 눌러 찍은 것 같은, 붉은 점 두어 개로 이어진 이름 모를 벌레. 그를 발견하기 직전, 내가 살짝이라도 왼편으로 발을 디뎠다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마지막 숨을 느낀 건지, 벌레도 누가 자신의 숨구멍을 막았는지 모를 그런 죽음.
일상을 벗어난 장소를 걷기 때문일까. 낯선 존재들 덕에 죽음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전날은 제주 중산간 마을 어느 곳이었다.
돌담 안 정원은 아담했다. 한쪽에 핀 꽃들 옆 풀밭으로 춤벗들과 줄지어 자리를 잡았다. 악기를 든 이들도 그 맞은편 단상에 올랐다. 바이올린과 장구, 징이 어우러졌다.
단상 근처 풀밭에서 무용가들의 움직임이 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의 역동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추는 즉흥춤 축제(제주 국제 즉흥춤 축제)의 무대를 열었다. 그들에게 자극받은 나와 춤벗들도 몸을 일으켰다.
삶, 바로 옆의 죽음
▲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 열린 즉흥 공연 춤의학교(대표 최보결) 춤꾼 26명이 제7회 제주국제 즉흥춤축제 <상가리댄스 빌리지 Evening Free> 즉흥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 ⓒ 춤의학교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맨발로 풀과 땅과 만났다. 기분 좋은 축축함과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까실거림. 발바닥이 전하는 새로운 감각이 손 끝까지 온몸을 깨웠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호르몬들이 춤 추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때가 있다. 당연히 내가 완전무결한 존재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의 실수에 사로잡혀 쪽팔림에 이불킥할 때도,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에 끄달릴 때도, 내 안에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을 남에게 발견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웃게 된다. 집 뒤편 봉우리와 이어지는 소담한 흙길을 걸으며, 나무 위 잔가지 사이를 오가는 청설모를 보며, 동네 골목 사이사이 숨은 낮은 주택 테라스 화분 위를 날아다니는 벌의 윙 소리를 들으며. 자연 속을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을 받아들이다 보면 생각이 올라온다. 삶이란 좋은 거구나.
손 끝에서 출렁거린 섬의 바람을 느끼며 허리를 굽혔다. 발바닥이 전하는 느낌을 눈으로도 보고 싶었다. 땅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른발 엄지발톱의 거무스레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항암 약물 치료 중 생긴 결과물이다. 치료는 끝났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다행히 새 발톱이 차근차근 올라가기 시작하며 처음보다는 많이 작아졌다. 그 옆을 무언가가 지나갔다.
검은색 동그라미 몇 개와 같은 색 작대기가 움직였다. 개미였다.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움직였다면 죽여버렸을. 개미의 몸과 다리가 재빠르게 지나가 풀밭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상했다.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생생히 느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간 그 순간, 나는 다른 삶을 끝낼 뻔했다.
이상하게 서글펐다. 개미를 죽일 뻔했다는 놀라움도, 실수로라도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게 됐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지 않았다. 내가 개미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꼭 내 죽음이 아니라도, 어떤 생명의 죽음이 이렇게 갑자기 올 수 있다는 사실에 아찔했다. 그 개미가 곧 나일 수도 있으니.
▲ 수레를 끈 말을 만난 제주 함덕 해변가 제주국제 즉흥춤축제 참여를 위해 머문 함덕에서 인간을 싣고 달리는 말을 만났다
그날 저녁 숙소 근처 해변가를 산책하던 중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 한 마리가 네다섯 명이 탄 수레를 끈 채 걷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관광객들이 그 위에 앉아 있거나 관심을 보였다. 수레가 잠시 멈춘 사이 길가에서 구경 중이던 아이가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저기에 똥을 싸는 거라고.
아이는 말의 엉덩이 근처를 가리켰다. 나선형 판자가 말의 엉덩이 아래 부분을 받치고 있었다. 판자와 다른 색의 무언가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이가 아이의 말이 맞다고 대답해주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상황을 평가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말을 부리는 사람은 왜 저렇게 했을까. 말의 생물적 특성 때문이었을까. 말은 언제 똥을 누는지 알기가 어려운 동물이라서? 말은 아무 데서나 똥을 누는 동물이라서? 그 똥을 아무 곳에나 두면 안 되기 때문에?
아니면 말을 부리기 위한 효율성 때문이었을까. 말에게 편한 공간에서 똥을 뉘게 하고, 뒤처리를 도와주기란 이익에 도움 되지 않으니?
일을 하면서 똥을 싸는, 그 모습을 남이 볼 수 있는 상황이 말이 처한 현실이었다. 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상황을 평가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생명 활동의 끝이자 재시작인 '배출'의 현장을 이렇게 접하다 보니 다른 부분들이 연이어 걱정됐다. 먹이는 제때 공급받는지, 휴식 시간은 주어지는지, 원한다면 동족과 소통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의 끝엔 내가 있었다. 그렇게 삶이 좋다, 살아 있음에 행복하다 외치는 나지만 만약 저런 비슷한 상황을 만들게 된다면, 그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살아가는 것'이라는 목표
갑작스럽게 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를 받고 2~3년 내 재발률 높은 암씨앗 세포가 몸 안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삶은 단순해졌다. 면역력을 높이고 몸의 생리적 균형을 바로잡는 일이 나의 지상 최대 과제다. 일을 통해 인정 욕망을 채우는 과거의 습관을 멀리하고, 소비를 최소화하고, 아주 미약한 노동이라도 수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 공부를 한다.
과거에 비하면, 대부분의 현대인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하고 간결한 일상. 그런 요즘이기에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면면히 관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 일상을 벗어난 후에도 나는 절실히 살고 싶어 할까.
순간적으로 오지랖 넓게, 오만하게 내가 말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말에게 인간과 같은 자의식에 얽매이는 망상 같은 정신 활동이 있을진 모른다. 그냥 그 순간에는 말과 나의 위치를 동일하게 두고 싶었다.
저렇게라도 살고 싶을까? 그렇게 묻자, 이상하게도 마음의 복잡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생명이라면 살고 싶어 할 것이다. 말은 계속 살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건 자신의 고삐를 잡은 이가 주는 식량이 소중할 테고, 그 먹이 활동의 결과물을 배출하는 일에 기쁠 것이다. 언제 죽음이 올진 몰라도, 그전까지는 잘 먹고, 잘 싸며 살아가는 것이 그의 목표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몸의 자연스러운 회복 능력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느껴봤기 때문에, 더더욱 잘 사는 것이 나의 목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살기 위해서 나를 살리는 삶의 기술을 매 순간마다 적용하려 마음 쓸 것이다. 지금과 같은 단순한 일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때가 온다고 해도, 예전과는 다른 렌즈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자연의 원초성이 살아있는 제주돌문화공원 제주의 돌과 땅과 바람과 함께 춤추는 춤벗들과 나(하늘색 반팔티와 바지를 입은)ⓒ 김미경
다음 날 춤의 무대는 제주 돌문화공원이었다. 커다랗고 동그란 돌을 세운 풀밭 위, 지구와 우주를 상징하는 곳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제주 설문대할망 신화 속 아들 오백 명을 상징하는 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바람과 샛소리에 인사하며 신발을 벗었다. 전날 밟았던 오픈 무대와 달리 좀 더 단단한 풀들이 느껴졌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그러자 이곳에 더 깊이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풀밭 위로 상체를 구부리며 발가락 옆을 지나는 붉은색 벌레를 마주했다. 어제 만난 개미보다 수십 배는 더 작았다. 기적이었다. 내가 그 붉은 점을 죽이지 않고, 죽이지 않음을 깨닫고 이렇게 마주했다는 것이.
그만이 아니었다. 풀밭 위를 걷는 수없이 많고 작은 벌레들이 내 주위를 지나쳤을 것이다. 그중 기적처럼 마주한 어떤 생명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손마디를 타고 내 몸 위를 걷는 그를 보며, 나도 함께 움직였다.
풀밭 위 나처럼 내 몸 위 그 역시, 매 순간 살아있었다. 풀밭 위 나처럼 내 몸 위 그 역시 움직이며, 숨 쉬며, 삶이란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간다. 모두가 삶과 죽음에서 평등한, 이 세계의 일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걸 너무 자주 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