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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an 20. 2023

馬과 나

지극히 사사로운 이야기

 오늘도 말과 함께 한다. 따각따각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다. 내 마음까지 스타카토로 가벼워진다. 말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손님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일이 내 밥벌이다. 이 밥벌이는 파리 잡는 끈끈이를 만들고 안장을 깨끗이 닦고 말을 운동시키는 것까지 다채롭다. 말을 돌보기 위해 재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사람들은 말이라 하면 강한 힘, 질주, 명예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바보 같은 모습, 말썽, 애정이 먼저 떠오른다. 말은 때때로 아둔하고 때때로 총명하다. 뭔가에 다리가 걸리면 뒤로 당길 줄만 알고 위로 뺄 줄은 모른다. 초식동물의 본능적 감이다. ‘잡혔다’고 생각하면 패닉 하며 발버둥 치려 한다. 그저 다리를 위로 들면 되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니 가여운 생물이다. 겁이 많고 힘은 세다. 작은 새 한 마리에 놀라 울타리를 부수는 아이러니한 동물이다. 말이 부순 울타리를 다시 손보는 것도 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의 몸짓은 어떻게 감지하는지 기민하게 반응한다. 다른 생명과 끊임없이 공명해야 살아갈 수 있는 점은 말과 사람의 가장 큰 공통점이다. 말은 솔직해서 등을 내준 사람의 몸뿐 아니라 감정과 태도까지 인지하고 반영한다. 말을 타면 맞닿아있는 서로의 숨과 몸으로 대화한다. 내 손과 다리, 체중을 바꿀 때마다 말도 변한다. 말과 유난히 손발이 잘 맞을 때면 켄타우로스라도 된 것만 같다. 다른 생물의 다리를 빌려 땅을 박차는 느낌은 매번 새롭다. 말이 아니면 누가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알려줄 수 있을까. 그래서 말에 빠져드나 보다.

  우락부락한 덩치와 달리 얼마나 순진무구한지. 말간 눈 속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순수하고 아름답게. 투명한 그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아도 사람 곁을 구하는 그들을 볼 때면 낯이 화끈거린다. 밥벌이한답시고 말을 이용하고 상처 주는 것도 내 일이라 그런 듯하다.


 그렇게 말들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내 일상이다. 치대지 않는 은근한 다정함에, 등을 내어주는 헌신에 매료 됐을까. 부대껴 온 세월이 벌써 8년이다. 처음 말을 보고 한눈에 반해 타는 법부터 배웠다. 말에 빠져버린 게 불행인지 행운인지 나는 아직도 말과 지낸다. 따뜻한 품과 정직한 눈빛에 폭 안겨 지낸다.

 말은 고개를 땅에 묻고 여린 풀을 찾아 유유자적 돌아다닌다. 말의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말들을 초지에 풀어준다. 노을빛 은은한 초지 위 말의 태곳적 행위가 얼핏 신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감스럽지만 현대에는 말이 자유로이 살 자리가 없다. 드넓은 평야 대신 조각보 초지 위에서의 시간. 노을이 머무르다 가는 정도의 찰나일까. 그마저도 사람이 허해야 누릴 수 있는 미천한 자유다.


 사람은 하늘 길을 가르고 물 위를 유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대는 점점 간편하고 쉽고 빠른 것을 쫓는다. 현대 사회에서 말은 레저 스포츠를 위한 가축에 불과하다. 반려동물과 산업동물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인간은 쓰임새 없는 가축을 허투루 키우지 않는다. 집안에서 키우는 동물은 가족의 역할을 한다. 고기를 얻기 위해 키우는 동물은 무게만큼 가치를 한다. 말도 그렇다. 말이란 동물이 쓰임새를 잃는다면 대부분 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종의 존속을 걸고 계약을 한 셈이다. 사람은 말에게 살아갈 터전을 주고 말은 사람에게 노동을 제공한다. 사람이 갑, 말이 을이다.


 오로지 사람을 위해 태어나고 길들여져 일하는 말을 보면 강한 연민이 든다. 일찍이 운명을 깨우치고 체념했는지 거부한 것들은 도태됐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만나온 말들은 모두 사람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산업의 시커먼 뒷면을 들추어 보았을 때, 나는 아연해졌다. 어느 날은 하루 다섯 시간씩 사람을 태우다 경련하는 말을 보았다. 그 말은 주사를 맞고 바로 다음 손님을 받았다. 나는 그 말에게 안장을 올려준 장본인이다. 차마 다 담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서야 처절히 통감했다. 어느 분야든 빛 들지 않는 면이 없겠냐만 나는 순리에 굴복해야 하는 말의 운명에 질겁했다.

 이제 와 반추하자면 말의 노동과 내 노동을 견주었던 것 같다. 가진 힘과 생명력을 깎아서 밥벌이해야 함은 사람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쓰임새를 다하여라.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그런 나를 불러 세운 건 글과 사람, 말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글쓰기는 이 산업에 뛰어든 나 자신에게 하는 고해성사다. 내 업보가 씻겨 내려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늘을 우러러 티끌 한 점의 부끄러움이라도 덜어내고 싶다. 나처럼 동물과 일하는 사람이 가지는 번뇌라 생각한다.


 말을 이용하고 사랑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말에게 치유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다. 말은 달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빠른 다리를 주고 친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부드러운 코를 내민다.

 많은 사람이 마장을 찾지만 나는 유난히 재활승마 친구들에게 마음이 간다. 재활승마는 지체 장애와 뇌 병변, 자폐를 가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 애들은 고삐를 제대로 쥐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손가락을 섬세하게 구부리고 몸을 민첩하게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도 그렇다. 문장을 만들어 뜻을 전하기 어려워한다. 비장애인 아이들이 세 번이면 해내는 것을 장애인 아이들은 수십 번 반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국 해낸다. 아이들이 마침내 해낼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희열로 짜릿해진다.


 우리 단골손님 J는 아니, 네, 무서워 같은 짧은 의사 표현만 쓴다. 말이 흔들리면 앞으로 쏠리는 어깨도 문제였다. J는 꾸준히 마장에 왔다. 무서워하면서도 말을 좋아한다. 꼬박꼬박 자신이 타는 말을 토닥여 주는 마음이 예뻤다.

 그런 J가 말을 타고 뛰어보자는 내 말에 '조금 만요'라고 대답했다. 손짓까지 취하면서 말이다. 내가 얼마나 기쁘고 놀랐는지 그 애는 모를 거다. 게다가 J의 어깨는 매주 조금씩 뒤로 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작, 그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인에겐 성큼, 한 걸음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걸음을 직접 목도하는 영광을 누렸다. J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렇다.

 우리는 재활승마 아이들의 취직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축하해 준다. 한 사람 쓰임새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스스로 밥벌이하는 능력이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줄 거라 믿는다.

 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겠지만 나는 아이들 모습에서 어느 때보다도 강한 희망의 빛을 본다. 그 빛이 내 마음 구석구석을 비춰주는 것 같다. 내가 주저앉고 싶어질 때마다 그 애들이 떠올랐다.  

 질척이는 죄책감의 진창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것도 결국 말이었다. 무구하고 온유한 이 생명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는 내 운명을 받아들여야겠다. 나는 다른 생명체 없이는 살 수 없도록 태어나 말에게 길들여졌다. 번뇌를 끌어안고서라도 이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말들이 내 심정을 안다면 인간은 생각이 복잡해 가여운 생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말과 사람에게 도움 되는 삶을 살고 싶다. 나 자신이 그렇게 쓰임새를 다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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