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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책 May 16. 2023

살인대국

  살인기원. 기원 간판의 이름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살벌한 기원 이름이네 하면서 기원의 문을 열었다. 기원 정중앙에는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만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바둑판과 바둑돌, 초시계가 얌전히 놓여있다.     


  ‘지금부터 대국을 시작한다. 나는 흑이고 너는 백이다. 덤은 7집 반이다. 제한 시간은 각자 2시간, 초읽기는 1분 3회이다.’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마음속에는 누군가의 말이 들렸다.

  “누구세요? 당신이 보이지도 않는데 대국을 어떻게 하나요?”

  ‘잔말 말고 바둑을 두어라. 너는 이 바둑을 두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네가 바둑을 두면 너와 관계된 사람들의 모습이 백돌 위에 보일 것이다. 백돌이 죽으면 그 사람도 죽을 것이니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해 잘 두어야 한다.’

  초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화점에 첫수를 두었고, 나는 대각선 방향의 화점에 착수했다.    

 

  눈을 떴다. 대국은 꿈이었다. 핸드폰 시계의 시간은 오전 5시 20분. 꿈에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몸에 땀범벅이라 샤워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바둑판 앞에 앉았다. 꿈에서 둔 대국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꿈이었지만 너무 생생한 대국이었다.

  상대는 바둑을 빨리 두었다. 흑의 기세가 위풍당당했다. 나는 상대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좌하귀, 좌변, 우하귀, 우변은 모두 백의 집이었지만, 상변의 백이 거의 잡혀있었다. 흑은 중앙을 지켜서 거대하게 집을 지었다. 이대로 흑의 집을 두면 지는 대국이었다.

  승부수가 필요했다. 끊임없이 시비를 걸며 중앙에서 난전을 유도했다. 나는 7분여를 소모하며 초읽기에 몰렸다. 중앙에서 흑돌 사이에 끼워 넣은 수는 사실 변칙에 가까운 수였다. 복기하면서도 느꼈다. 이 수는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후 상대는 흔들렸다. 실수를 연발해 잘못 받아 백이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상대의 명백한 실수였다.

  극복 못할 집 차이가 보이자 상대는 돌을 던졌다. 180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뒀다.

  하지만 중앙에 끼워 넣은 수와 좌상귀의 수가 잡혀서 백돌 두 점이 죽었다. 좌상귀의 사람은 기억나지 않지만, 중앙의 죽은 백돌은 친구 정은이었다. 잡힌 백돌 정은의 모습이 생각나 순간 끔찍했다. 하지만 꿈이었으니까. 다 괜찮을 것이다.     


  “어. 벌써 일어났네. 연구생 입단대회라고 일찍 깨워달라고 하더니.”

  “악몽을 꿔서 일찍 일어났어. 엄마, 아침은 뭐야? 나 배고파.”   

  

  오늘은 연구생 입단대회라 한국기원에 갔다. 대회 준비로 기원은 북적한 분위기였다. 나는 연구생 내신 성적 1위로 8강부터 출전했다. 8강전 상대는 정은이네. 만만치 않은 상대다. 대국 준비를 위해 자리에 앉았다. 대국은 늘 긴장되지만, 이번에는 꼭 입단하고 싶다. 대국이 시작했는데도 정은이 오지 않는다. 15분이 지나면 기권 처리가 되는데 정은은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어제 꿈이 생각난다. 설마⋯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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