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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지 Jan 17. 2022

축제 중 장례를 치르다.

 

 직장 상사 앞에서 통곡해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나는 있다. 축제 첫날의 일이다. 우리 재단에서는 매년 다이내믹 댄싱카니발이라는 축제를 개최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도로를 봉쇄하고 일주일 간 온 직원이 밤낮으로 뛰어다녔을 정도로 큰 축제였다고 한다. 올해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3일간 비교적 간단히 진행되었지만, 입사 1년차인 나는 '드디어 댄싱카니발을 직접 보는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들떠있었다. 


 오후 세 시쯤이었을까. 확성기와 방역 패스 안내문 등을 바리바리 싸 들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던 길, 아빠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할머니가아프대」


  띄어쓰기도 안된 그 문구를 아빠가 어떤 심정으로 작성했을지 아직도 가늠할 수가 없다. 메시지를 확인한 직후 전화를 걸었는데, 목소리가 많이 침체되어 있었다. '오늘을 못 넘기실 수도 있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런 상태로 얼떨결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계단 위에서 대리님이 나를 부르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내가 우는 걸 보고 내려온 대리님이 어서 집에 가라고 했던 것만 기억난다. 나는 그렇게 축제용 STAFF 점퍼를 입고 충주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할머니는 치매가 심해진 이후 요양병원에서 약 12년의 세월을 보냈다. 함께 살았던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가 서른을 보기 시작했으니 참 긴 시간이다. 그런데도 시외버스 안에서 나는 내내 과거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틀니를 잃어버리던 할머니, 안방 아랫목에 앉아있는 할머니, 용돈을 쥐어주시던 할머니, 학원 앞에서 손주를 기다리던 할머니. 잘 웃던 우리 할머니를. 


 병원 앞에는 코로나19로 미처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친가 어른들이 떼로 서있었다. 스치듯 본 고모의 눈시울이 붉었다. 병원 측에서는 코로나19로 원래 입장이 불가능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두 명씩 10분 정도 할머니를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다. 상황이 좋지 않다니. 불길했지만 나는 할머니가 정말로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숨 쉬고 있는 앙상한 몸을 보았을 때조차 곧 괜찮아지실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날 할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내가 병실에서 나온 지 한 시간 반 만에.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한단 말은 너무 뻔하다. 
그렇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모두가 그 말에 공감할 것이다. 
또 잘하지 못해 후회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듯.


 대학생 때 학부 과제로 <오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축제적 연희로 죽음을 수용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했던 작품. 영화에서 한국식 전통 장례로 굿판을 벌이는데 그 분위기가 흡사 축제 같았다. 장례를 치르는데 갑자기 그 영화가 떠올랐다. 꽃을 바치고, 어떤 이는 성부와 성령의 이름을 찾고, 불을 피우고,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얼마 전 쌍커풀 수술을 한 친구를 못 알아봐 웃기도 했다. 그렇게 종종 울고 가끔은 웃으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발인 후 마음을 한 번 쏟아내고, 와준 친구들에게 고마워하다가, 입관 때 또다시 울고, 기운을 차리며.


 남들은 입관이나 화장을 할 때가 가장 슬프다던데 나는 산소에서 유골 위로 흙을 뿌리며 가장 많이 울었다. 막상 자연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그게 그렇게 눈물이 났다. 살아있다는 건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남아있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최대한 후회할 짓을 만들지 말자, 다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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