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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Mar 15. 2023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근데 또 그게 어색하네요.

 "난소도 깨끗하고 자궁경부도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이 다 좋아요."


  오랜만에 산부인과 검진을 다녀왔다. '매년 검진을 해야지' 생각해 놓고 날짜를 봤더니 2022년은 건너뛰었다. 예약제 병원이 아니니 다음 검진일을 미리 예약해 뒀다가 때가 되면 알람을 보내주는 시스템이 아니니, 언제 갔었는지도 의식적으로 챙기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수도 없이 받은 검진이지만 아직도 불편한 산부인과 검진. 친절한 여의사와 간호사분들의 도움이 무색하게 차갑고 단단한 금속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일은 언제나 불쾌하다. 의사 선생님은 손의 온기로 내시경을 데워주기도 하시지만, 의료용 장갑을 뚫고 온기가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All Clear.


 산부인과에서 이런 결과를 듣는 것을 오히려 어색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0대부터 달고 살던 자궁근종과의 이별 이후에나 들을 수 있었던 말.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여성들은 어느 정도 크기 이하의 자궁 근종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자궁내막증이나 다낭성 난소증후군, 자궁선근증, 난소종양을 포함한 다양한 자궁이나 난소 질환을 데리고 산다. 때문에 '추적 관찰만을 요하는 의료적 소견'이 있는 정도의 것을 가지고 사는 것이 정상화가 되어버린 것도 같다.


 의사가 내시경으로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피는 와중에 어느 부분에서 화면을 멈춘 다음 무언가의 크기를 측정한다. 숨이 훅 하고 막힌다. '뭐야, 그 사이에 또 뭐가 생긴 거야? 아주 조금 남겨둔 자궁도 자궁이라고 거기에 뭐가 생긴 건가?' 순식간에 온갖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다 깨끗해요. 자궁도 난소도. 아까 살짝 혹처럼 보이는 게 있어서 봤는데 혈관이었어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합니다."

 점막하근종, 자궁선근증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서인지 '깨끗하네요'라는 말을 의사에게 듣는 것이 감격스럽기보다 어색하게 느껴지고, 어색하게 느끼는 내가 또 우습게 느껴진다.


 검진을 하러 간 때에 나는 배란 중이었고, 내시경을 통해 배란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도 볼 수 있었다고. 어쨌든 난소의 기능은 정상적으로 잘 되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깨끗한 자궁과 난소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일. 이제는 이 검진결과가 익숙한 것이 되어가겠지.


 매주 주말마다 함께 춤을 춘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과 지난 주말 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나눴다. 몸을 많이 드러내놓는 추는 춤이기 때문에 서로의 몸에 대해서, 특히나 거울에 비치는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어떤 시선을 가지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 언니는 나와 함께 오리타히티와 훌라뿐 아니라 평일에 폴 댄스를 열심히 추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춤을 출 때마다 - 특히 폴댄스는 함께 춤추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피부로 드러나는 자가면역질환에 대한 편견을 가질까 봐 늘 마음이 움츠러들었었다는 얘기를 이제야 털어놨다. 나는 2년간 언니와 함께 춤을 추면서 언니의 병을 한 번도 인지하지 못했다. 자가면역질환은 전염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피부로 드러나기 때문에 여전히 사회적인 편견이 환자들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폴댄스를 마치고 집착적으로 폴을 소독티슈로 빡빡 닦으며 '혹시나 남들이 나를 전염병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매번 해왔다고 했다. 자가면역질환에 가장 중요한 위험요소는 스트레스. 언니는 스트레스를 매니지 하러 간 곳에서 스스로 움츠러드느라 스트레스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춤을 출 때 내 배꼽 아래의 수술자국에 의식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주 수업에서는 내가 더 이상 수술자국에 의식을 두지 조차 않는다는 것을 - 이 수술자국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부여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순간 알아차렸다. '배꼽이 좀 커졌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 말고는 이 수술자국에 대해 별 생각이 없어졌다. '이 또한 나의 역사'라며 부자연스러운 정신승리를 할 필요도 없어진 날이 온 것일까.


 "I am rooted, but I flow."


 한남동 뒷골목을 걷다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근사하게 걸어둔 것을 봤다. 'rooting'나 'grounding'같은 말들을 명상이나 책을 통해 접할 때마다 이게 진짜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뿌리 차크라라고 불리는 1번 차크라가 조화롭고 균형 잡히면 삶에 안정감이 생긴다고 한다. 1번 차크라의 위치는 자궁을 포함한 생식기 위치. 깨끗하게 정화하고 좋은 에너지가 돌게 하고 싶다. 뿌리가 더 깊고 안정적으로 내려야 더 멀리 자유롭게 흐를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확실하게 알게 됐다. 뿌리가 안정적이지 않으면 계속해서 헤매고 방황할 뿐, 자유롭게 흐를 수가 없다는 것을. "I am rooted, so I f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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