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별식

by 지락

마당의 코스모스가 가는 바람에 살랑거렸다. 누군가 코스모스를 향해 한 송이만 있어도 예쁘고 무리 지어 피어도 예쁜 꽃이라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무한 긍정하며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디오에서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흘러나왔다. 주말 내내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진행자가 이 곡을 선정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코스모스와 산산한 바람, 그늘의 기분 좋은 온도로 가을이 왔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데 노래까지 더해지니 ‘이래도 가을이라 하지 않을래?’라며 강요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기분 좋은 강요이기는 했다.

가을이 턱밑까지 차올랐음에도 나의 일상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여름이 남아있었다. 옷걸이에는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리넨 셔츠, 짧은 바지들이 언제든지 입을 수 있도록 걸려있었다. 매일 덮고 자는 이불도 인견이 섞인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앉을 때 땀이 차지 않게 깔고 앉는 방석도 여전히 의자 위에 올려져 있다. 시원한 바람을 기대하며 밤에 활짝 열어 두던 창을 조금씩 닫고 있다는 사실만 달라졌을 뿐이었다.

이제 여름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을 벗어나기 두려웠을 만큼 지나치게 찌는 무더위에 빨리 지나가기만을 염원하던 여름 아니었던가. 열린 거실 창으로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낮아진 기온에 감사하며 여름과 잘 헤어지고 싶었다. 이미 가을이 와버려서가 아니라 여름의 끝자락을 잘 갈무리하고 밀려드는 가을을 기꺼이 환대하며 잘 만나고 싶었다.

늘 그랬다. 꽃도 일도 사람도 잘 헤어져야 다음 만남이 좋았다. 꽃 피우기를 끝낸 식물은 줄기를 잘 정리해 주어야 알뿌리가 땅속의 영양을 흡수하고 다음 해 다시 예쁜 꽃을 보여주었다. 일도 일련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반성이 있을 때 다음 일이 기대로 다가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만남보다 헤어짐이 중요함을 수 없이 경험했다. 이별 속에 내포된 상처를 인정하고 덧나지 않게 스스로 잘 보듬어야 또 다른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다.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이불과 베갯잇을 벗겨내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시작했다. 청소기로 침대와 주변을 청소하고 지난봄 깨끗이 빨아 손질해 두었던 이불을 꺼냈다. 하얀색 솜이불을 펴고 베갯잇도 새로 끼웠다. 침대 하단의 모서리로 돌아서 이불깃을 팽팽하게 당겼다. 베개는 두 개씩 각을 세워 침대 머리에 줄을 세웠다. 허리를 세우고 둘러보았다. 환해진 침대 주변과 조명으로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빨래 건조기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이불을 꺼내 펼쳤다. 깨끗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먼지를 털고 주름을 펴서 이불을 보관하기 좋게 가지런히 접었다. 이불을 정리하며 여름 내내 찌들었던 내 마음도 하얘졌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내게 스며들었던 먼지도 사라진 듯했다.

작은 방으로 갔다. 옷걸이에 걸린 여름옷들을 걷어냈다. 커다란 종이 가방을 찾아 세탁소에 갈 옷들을 접어 넣었다. 세탁물을 차에 실었다.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았다. 나는 세탁소를 향해 달리며 여름과 기분 좋게 이별했다. 깊고 푸른 하늘을 보며 개운한 마음으로 가을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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