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고 지듯이-조승우(2015)
꽃이 피고 지듯이
조승우
나 이제 가려합니다
아픔은 남겨두고서
당신과의 못다 한 말들
구름에 띄워놓고 가겠소
그대 마음을 채우지 못해
참 많이도 눈물 흘렸소
미안한 마음 두고 갑니다
꽃이 피고 또 지듯이
허공을 날아 날아
바람에 나를 실어
외로웠던 새벽녘 별들 벗 삼아
이제 나도 떠나렵니다
이렇게 우린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마주 보고 있어도 닿을 수 없어
왜 만날 수 없었나요
행여 당신 가슴 한편에
내 체온 남아 있다면
이 바람이 흩어지기 전
내 얼굴 한번 만져주오
-출처 : 꽃이 피고 지듯이-조승우(작사 : 방준석)
https://www.youtube.com/watch?v=y-sqDi4cgdI
조선의 역사 속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면 저마다 꼽는 여러 비극들이 있을 것이다. 조선의 역사 속 행해졌던 크고 작은 사화부터, 왜와 여진의 준동으로 인한 양난의 비극, 국권 피탈과 일제의 강점의 그림자. 그러나 조선 왕가에 있어서의 가장 큰 비극을 묻는다면 단연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비정한 아버지와 불운한 아들이 야기한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 후대가 영조와 사도세자를 보며 내리는 평가 중 하나이다.
이 사도세자를 다룬 책이나 드라마, 영화는 굉장히 많다. 조선의 역사 중 가장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수많은 예술인들의 단골 소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와 영조의 개인적 관계와 심리상태를 확실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은 단연 이준익 감독의 2014년 작품인 '사도'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정치적 관계나 여타 소설적 가미를 더해 더욱 극적인 면을 강조한 타 작품과는 달리 이준익 감독의 '사도'는 내내 비극적으로 파국을 향해 치닫는 아버지와 아들의 심리적 갈등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영조 역의 배우 송강호와 사도세자 역의 배우 유아인의 흠잡을 곳 없는 감정 연기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상황에 한층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른 작품에 비해 자극성은 떨어질지라도 사도세자를 다룬 영화 중에서는 '사도'를 가장 수작으로 꼽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관통하는 비극을 한층 더 강조하는 것은 영화의 OST로 쓰인 '꽃이 피고 지듯이-조승우'라는 노래이다. 오늘은 바로 이 노래, 아버지와 아들의 엇갈린 사랑과 애정이 구슬프게 나타난 노래 '꽃이 피고 지듯이'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1세 때 얻은 둘째 아들이다. 지금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늦게 얻은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는 더욱 그랬다. 특히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훨씬 전, 영조의 첫아들이었던 효장세자가 불과 9세의 나이로 요절함에 따라 새로 태어난 사도세자는 영조의 귀한 아들이기 이전에 조선의 새로운 후계자이자 왕가의 귀한 후손이었다. 당연히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영조의 기쁨은 매우 컸다. 그 심리상태를 반영하듯이 영조는 후궁의 소생이었던 사도세자를 즉각 중전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았으며, 그 이듬해에는 세자의 작호를 내린다. 이는 영조 이전까지의 모든 조선 역사 속에서 가장 빠른 세자 책봉으로 꼽힌다. 당시의 풍습으로 아들만이 가문을 이을 수 있었는데, 늦은 나이에 가문을 이을 아들을 얻은 영조의 기쁨은 당연히 컸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기쁘게 했고, 왕실 어른들의 축하와 환영을 받으며 세상에 나온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매우 영특했다고 여겨진다. 특히 세자가 2살이 되던 해,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아버지인 영조를 가리켰으며, 세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자신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후 조금 더 자리 글자를 알게 될 때 즈음에는 아버지 영조가 '비단과 무명 중 무엇이 더 나은지'를 묻자 세자는 '백성을 입히는 무명이 더 낫습니다.'라고 답하며 무명옷을 입겠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9세가 되던 해 식사를 하던 중 영조가 부르자 입에 있는 음식을 보이지 않게 뱉고 대답하는데 이에 대해 영조가 묻자 '소학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총명함이 남달라 아버지와 대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왕실의 기쁨이 바로 세자였다.
그러나 이 세자는 단순히 문관형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자가 두 살이었을 때 책봉례에서 세자를 본 대신 조현명은 그에게서 효종 임금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효종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무인에 가까운 피가 그에게로 내려온 것을 보았던 것일까. 그의 예언을 입증하듯이 세자는 자라나며 점차 무예에 재능과 관심을 가지게 된다.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 남긴 기록인 '한중록'을 보면 세자는 종종 예복을 벗어버리고 군복을 입었으며, 제갈량의 출사표를 좋아해 홍역에 걸려 앓고 있을 때도 그것을 읽어달라 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세자 개인적인 성향에 더해 당시 조선의 상황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조 임금이 청으로부터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이후부터 조선 전역에서는 삼전도의 굴욕을 설욕하고, 오랑캐의 국가인 청을 무너뜨리겠다는 북벌론이 대두되었던 당시의 조선 청년들에게 세자와 같은 기상은 어쩌면 마땅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버지인 영조는 무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가 숙종 임금의 적자가 아니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무인의 성향을 드러낼 기회가 없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노론의 비호 아래 정권을 시작했던 영조의 입장에서는 노론의 의지를 거스르며 무인의 자태를 보여주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의 이토록 다른 상황과 성향은 점차적으로 둘의 거리를 떨어뜨리게 되었고, 결국 조선 왕가 최대의 비극을 낳게 된다.
사도세자가 성장할수록 아버지 영조의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아버지인 영조에게는 실망만을, 아들인 사도세자에게는 부담감과 고통을 배가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특히,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가 당시 궁녀 중 최하위 계급이었던 무수리 출신이었기에 가진 특유의 자격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했고, 자신의 뜻을 유연하게 접고 무엇보다 타인에게 책 잡힐 일을 조금도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실록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이러한 배경은 종종 그의 약간의 성격장애와 같은 면을 길러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그가 자신과 같은 기준을 강요하고 기대하던 사도세자는 그와는 정 반대로 족보상으로(실제로 그는 후궁의 소생이었다.) 왕의 완벽한 적장자였다는 점이었다. 즉 영조는 자신의 삶의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삶의 자세를, 사도세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체득할 기회가 없었으며,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궁에서 자신을 마주칠 때마다 칭찬보다는 면박을, 웃음보다는 노여움을 먼저 표하는 아버지는 사도세자에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주었을 것이다. 하물며 그 아버지가 단순히 육체의 아버지가 아닌, 그 나라의 지존으로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오롯이 쥔 사람임에야 부담감은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영조가 즉위한 지 33년째 되는 해의 실록 기록을 보면 영조가 신하들에게 동궁(여기에서는 사도세자를 의미)이 자신과 마주한 지 넉 달이 넘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즉 한 궁 안에 살면서도 무려 4달을 아무런 교류 없이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와 같이 망가진 이유에는 분명 둘의 정치적 입지 차이가 존재했다. 영조는 비록 제위기간 내내 자신의 방법으로 탕평책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붕당정치의 패단을 없애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즉위 과정에서 사실상 묵인으로 협조하였던 노론 세력의 심기를 거스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영조의 왕위 계승의 성리학적 논리가 빈약했기 때문이었는데, 차기 왕위의 향방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실력보다는 선천적 신분과 혈통이 매우 중요했던 조선에서는 영조의 초기 왕권은 사상누각과 같았을 것이었다. 따라서 영조는 현실 권력을 쥐고 있던 노론 세력과 일정 부분 타협하며 정치를 시행해나가야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자꾸만 아버지의 의중과는 달리, 소론의 주요 인사들과 친교를 나누곤 했다. 그들과 함께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공유했고, 그들의 언어를 체득하였다. 이것은 당시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노론 세력에게는 공격의 빌미가 되었고, 아버지인 영조의 심기도 상당히 거스르는 행동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결국 두 부자는 성격에서도, 정치적 입지에서도 점차 거리를 벌려가기 시작했다.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기 직전 아버지인 영조가 찾아와 아들의 뺨을 쓰다듬는 장면이 나온다. 영원한 이별을 직감했을까.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에게 자신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영화 '사도'의 관점에서 둘의 관계를 해석한다면 사도세자는 언제나 자신의 앞에 서있던 영조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버지로, 그저 한 사람의 아버지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단순히 한 사람의 아들이 아닌, 향후 권력을 승계하고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 후계자이자 차기 대권 주자였으며,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했다. 결국 그 점은 둘을 관통하는 갈등의 뿌리가 되었고, 결국 조선 왕가 최대의 비극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과, 이와 엇갈리게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결국 그 틈을 좁힐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갈등과 비극을 더욱 심화하는 요소는 역시 영화에 활용된 OST인 '꽃이 피고 지듯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노래 가사 중 아래의 가사가 사도세자와 영조의 드러내지 못했던 속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우린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마주 보고 있어도 닿을 수 없어
왜 만날 수 없었나요
결국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아꼈던 한 사람의 아버지와 한 사람의 아들은 둘 사이의 간극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주 보며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항상 마주 보고 있었지만 만나지 못했던 것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차갑고 냉정하게 서로를 대했고 눈물을 머금고 비극을 감내해야 했다. 아버지 영조는 사랑하는 아들 사도세자를 희생함으로써 그의 아들인 어린 세손(정조)이라도 살려야 했던 것이었고, 아들인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를 사랑하면서도 늘 자신을 보며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차가움에 한 평생을 떨어야만 했다.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이름, 생각으로도 설워지는 이름. 그것이 바로 아버지 영조가 평생에 걸쳐 괴로워하며 슬퍼했던 이름인 아들 사도세자의 묘호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 기록된 비정하고 매정한 한 노인은 어쩌면 우리들의 생각보다도 연약하고 슬픔을 안고 살아야만 했던 한 사람이자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