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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당나귀 Jul 24. 2023

언어의 성차별


베를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독일어 B1 자격증을 갓 딴 상태라 조금은 자신만만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일상 회화를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는커녕 나는 독일어로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어느새 내 생활은 영어로 기울어 있었다. 난생처음 외국에 나와서 마음 맞는 친구들이랑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새벽까지 영어로 인생 얘기를 하는 게 너무 좋았다. 농담부터 앞으로 뭐 하고 살고 싶은지까지. 우리는 독일에 있지만 친구들은 브라질과 포르투갈 사람으로, 포르투갈어가 여러모로 더욱 유리한 언어였다. 나는 포르투갈어 한 마디 못하지만 6개월이 쌓이자 둘이 떠들어도 대충 무슨 주제로 어떤 대화를 하는지 감이 왔다. ‘너희 이런 얘기하지?’하면 둘은 놀라서 ‘너 진짜 포르투갈어 할 수 있지 ‘하는 격이었다.


영어에서 거슬렸던 건 ‘guys~’라는 표현이었다. 내 주변 친구들은 거의 다 여성이었는데 우리 다수를 부르는 건 ‘guys~’였다. 그러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우리 중에 guy는 한 명도 없는데’라고 말했다. 차츰차츰 우리는 ‘girls’나 ‘gals’로 우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이스가 한 명도 없는 무리에서 가이스로 호명되는 건 뭔가 불편하다. 나는 지금도 단톡방에 모두를 칭할 때 ‘guys’라고 하지 않고 그냥 ‘you’라고 하는 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men이 인류를 지칭하는 것, mankind, humankind, human being 등 모든 인류는 남성 명사로 불린다. 그 휴먼에 들어가 있는 여성들이 서운할 지경이다. 독일어도 심한데, 모든 문장이 예를 들면 ‘man kann essen’ 이런 식이다. 사람은 먹을 수 있다. 나는 사람이지만 man은 아닌데, 그럼 내가 먹으면 ‘frau kann essen’ 이렇게 써야 하나?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쓰는 사람은 없다. 여성(frau)은 인류를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을 주어로 인류 보편적인 문장을 써도 아마 읽는 독일 사람은 그걸 여성에게만 국한된 특별한 케이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초반에는 중립적인 사람의 복수형인 ‘Leute’를 많이 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도 ‘man kann…’을 쓰게 되는데…


독일어를 배우고 즐거운 점은 철학서나 번역본을 볼 때 한국어 옆에 독일어 단어가 병기되어 있을 때다. 얼마 전에는 ‘지배(Herrschaft)’를 보고, 분명 Herrschaft가 지배라는 뜻이 맞는데… 묘하게 불편해져서 이 글을 쓰게 됐다. 왜냐하면 또 그놈의 ‘Herr’는 남성의 미스터라는 뜻이고 ‘-schaft’는 어떤 것의 성질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메일을 쓸 때도 남성에게 ‘Sehr geehrter Herr (성)’라고 쓴다. 문자 그대로 남성의 본질, 성질이 지배라면 여성은 복종인가? 말도 안 된다. 이런 식의 위풍당당하고 뻔뻔한 단어들이 싫어서 주변 사람들과 바꿔버리고 싶다. 이를 테면 ‘dummschaft’ 바보성질이라던가.


Herrschen도 지배하다, 통치하다라는 동사다. 하지만 모든 Herr들이 Herrschen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끔 내 그대로 성별을 남성으로 바꾸고 공작새 그대로 여성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남자인 나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 고집 세고, 이기는 것 좋아하고, 아는 척하고, 똑똑하지만 자기가 똑똑한 걸 알고… 내가 딱 피하고 싶은 남자의 성격이다. 하지만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성격이 좋다. 이런 도전적인 성격 때문에 독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공작새도 한 고집하지만 만약 그가 여자였다면 나 같은 남자는 피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튼 Herrschen이라는 동사는 남자(Herr)인 공작새보다는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


Mannschaft라는 단어는 선수단이라는 뜻인데 국가대표팀이 Nationalmannschaft(국가를 대표하는 남성들)이다. 더 웃긴 건 여성 대표단은 Frauenmannschaft다. 단어가 불필요하게 길다. 여성남성schaft인데 굳이 선수단이나 대표팀에 또 ‘Mann(남성)’을 넣어서 단어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다. 언어는 아주 오랫동안 통용된 약속일뿐이다. 아마 이 단어들이 만들어졌을 때 국가 대표팀은 남성밖에 없었고 여성이 지배하거나 침략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언어가 만들어진 긴 세월 동안 모든 좋은 미덕과 본성들에는 남성이 붙어있다. 이는 인류(언어) 역사상 가장 오래된 통치 체제가 가부장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단어가 웃기다고 생각하면 지금부터 바꿔나가고 다르게 약속하면 되지 않을까?

학생 식당 멘자 메뉴 이름 중에서 가장 기가 찼던 것은 ‘Sojagulasch Hausfrauen Art’다. 여성(Frauen)이 드디어 단어에서 호명되었나 봤더니 ‘채식 굴라쉬(갈비) 가정주부 스타일’이다. 수많은 가정에서 각기 다른 채식 갈비를 만들 텐데 가정주부 스타일(Hausfrauen Art)은 또 뭔가! 여성의 본성은 지배도 국가 대표단도 아니고 그냥 채식 갈비를 만드는 가정주부인가!


전 세계적으로 성차별적인 직업 이름이 바뀌고 있다. Krankenschwester (간호사)에서 Schwester는 언니나 여동생을 뜻하는 자매다. 이 간호사는 이제 Krankenpfleger라는 성별 중립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Pfleger는 돌봄 노동 제공자, 간병인이다). Fireman이 아니라 firefighter가 더 멋있듯이 Herrschaft같이 전통적인 단어도 Frauschaft로 바꿨으면 좋겠다.


“한자의 ‘혐(嫌)’ 자체에 ‘계집녀(女)’를 포함하고 있다. 한자를 비롯해 거의 모든 언어에서 부정적인 의미는 여성성과 연결된다. 여성 혐오는 언어의 기본 구성원리다.”

 -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정희진


언어에 성별이 있어서 더 성차별적인가 싶었는데 그렇지만도 않다. 싫어할 혐자를 찾아보니 女 자와 兼(겸)이 결합되었는데 겸은 ‘겸하다’, ‘배가 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자가 배가 되는 것이 혐오스러운 것이다.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고 하는데 집을 부수고 자시고 한 단어 한 문장 쓰기가 어렵다.


요즘 드문 드문 시도하고 있는 건 ‘man(남성)’대신 일반적인 상식이나 보편 사람을 말할 때 ‘frau(여성)’을 쓰는 거다. 하지만 공작새가 처음으로 ‘”Frau” kann das Auto mieten’이라고 문자 했을 때 나는 누구나 차를 빌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여성만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해 버렸다. 익숙하지 않아서 먼저 제안했지만 까먹었다. 대체로 man을 쓰지만 생각나면 frau로 바꾸는 것으로. 처음에는 한 사람만, 그러다가 두 사람이, 점점 많은 사람이 바꾼 언어를 쓰게 되고 약속을 해버리면 좋겠다. 자장면이 짜장면 됐듯이 사실 언어를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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