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린당나귀 Oct 19. 2023

짬뽕과 환대

누군가를 환영하는 잘 차려진 한 상

추석 당일, 집에서 대판 싸우고 짐을 싸 나온 후로 길거리에서 짬뽕을 찾아다니는 꿈을 꿨다. 길거리에 보여서 들어간 중국집은 정말 정통 중국인들만 오는 곳이라 모든 메뉴가 중국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메뉴가 3만원이라 비싸서 나갔다. (꿈에서도 3만원짜리 짬뽕은 못 먹었다). 그 후로 네이버 지도에 뜬 다른 영업중인 중국집으로 짬뽕을 찾으러 갔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꿈에서 깨버렸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눈을 떴을 때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는 상황에 처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독일의 내 방이라는 걸 알자 마자 슬퍼졌다. 짬뽕을 못 먹어서 슬펐던 건지 한국이 아니어서 슬펐던 건지. 


그래서 결심이 굳어졌다. 며칠 전에 금요일이 추석 당일이라고 하자 공작새가 같이 보내자고 했다. 새로 생긴 라멘집을 갈 지, 더 큰 도시에서 외식할 지 고민했다. 나는 추석이 뭐라고 상관 없어서 서로 친구를 만나도 된다고 했지만 짬뽕 찾기 꿈을 꾼 이상 꼭 짬뽕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짬뽕이 확실하게 있는 한식당은 뒤셀도르프, 기차 타고 한 시간 거리다. 정각 5시 땡 치자마자 퇴근 해서 후다닥 뒤셀도르프로 향했다. 추석이라 예약을 못하면 못 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예상했던 대로 만석이었고 그래도 식당 앞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못 먹고 갈 수는 없었다. 예약한 사람이 오지 않아서 금방 들어갔고, 공작새가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이미 머릿속에 담아놨던 메뉴를 예약했다. 빨간 국물 짬뽕과 파를 얹은 두부 튀김. 


사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후로 모든 해산물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그 결심은 짬뽕 앞에서 의외로 금방 무너졌다. 독일에 살면 해산물을 먹을 일이 거의 없는데 지난 5년간 이렇게까지 짬뽕이 땡긴 적은 처음이었다. 비건을 하지 못한 마음의 짐도 있었지만, 짬뽕은 한달 전부터 먹고 싶었고, 첫 월급으로 한식당에서 맛난 걸 먹고 싶었고, 게다가 길바닥에서 짬뽕을 찾아다니는 꿈까지 꿨다. 


작년 이맘때 ‘반찬이 먹고 싶어!’라는 글을 썼다. 말 그대로 반찬이 먹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그중 가장 먹고 싶었던 건 강남의 꽁치 김치찌개였다. 말이 씨가 되는지 나는 영락없이 강남역 출근을 경험했고 첫 출근날과 퇴사날 꽁치 김치찌개를 먹으러 갔다. 이번에는 엄마 아빠랑이 아니라 공작새와 함께. 처음 갔을 때는 공작새가 매울까봐 청양고추를 빼달라고 했는데 맵지 않으니까 내가 알던 맛이 아니었다. 순한맛 김치찌개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퇴사날에는 아무 말 없이 매운 김치찌개를 먹었다. 폭신폭신 뜨거운 계란 말이도 꼭 시켰다. 공작새에게 꽁치와 밥을 김에 싸서 먹는 법을 알려주었다. 두 번 다 밥 추가해서 배부르게 먹었더니 꽁치 김치찌개가 간절하게 생각나지는 않는다. 


짬뽕과 두부 튀김은 환상의 조합이었다. 짬뽕 국물을 계속 들이키는 바람에 면이 조금 남았다. 공작새는 냄비 한쪽 손잡이를 들어 기울인 다음 바닥에 남은 국물을 계속 마시는 내공을 보여줬다. 양도 엄청 많았는데 두 메뉴를 뚝딱하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정말 맛있는 걸 먹을 때 콧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데(다른 분들은 안 그러나요?) 오랜만에 춤이 나왔다. 정말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빨간 국물이 튈까봐 휴지로 턱받이를 만들었다. 맞은편 테이블의 백인 할아버지도 짬뽕을 시켰는데 어김없이 국물이 튀어서 티셔츠를 보고 웃었다. 


산책하며 꼬리가 한없이 하늘로 올라간 강아지들을 보며 생각했다. 인생은 강아지처럼. 강아지들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다른 강아지랑 산책 하면 좋고, 좋아하는 사람이랑 맛있는 걸 먹으면 좋고. 그게 사실 전부다. 강아지들 생에는 슬픔이나 미움보다는 사랑이 가득하다. 나도 저렇게 단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친구가 ‘환대 받아본 게 오랜만’이라는 얘기를 해서 생각났다. 타국에서 환대는 외국인끼리 해줄 수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이 아니라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외국인 청에 비자를 받으러 서는 줄, 먹고 싶은 음식을 하려고 해도 재료가 없는 슬픔, 언제나 응원해줄 든든한 가족이나 오랜 친구가 없는 서러움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딱히 독일인 친구가 없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나보다. 그들이랑은… 통하는 부분이 별로 없다. 이민자 배경의 독일인 친구는 또 다른 이야기다. 


환대는 정성이 들어간 밥상이다. 아빠가 나를 주려고 남겨놓은 낚시해서 잡아온 쭈꾸미, 연말에 이웃 집에서 다 같이 밥을 먹었을 때 자리가 부족했던 밥상, 매생이 국과 파전과 샐러드와 친구가 나에게 맛보여 주려고 주문한 비건 새우 튀김, 매일 조그만 솥에다 콩이나 옥수수를 넣어 지은 갓 한 밥. 우리는 먹지 않고 살 수 없으니 가장 큰 사랑과 정성을 먹는 일에 보여준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사람에게 베푸는 건 아끼지 말고 쪼잔하게 굴지 말고 베풀라고 했다. 내가 한 사람에게 베풀면 그 사람이 나에게 빚을 갚듯이 되갚는 게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인생은 돈으로 왔다갔다 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내가 무언가 급한 사람에게 베풀면, 그 사람은 이 일을 기억했다가 언젠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그래서 언제 어디선가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도 안 이성적이고 안 공리주의 적이고 안 과학적이지만 세상 일이 이렇게 돌아간다. 


환대가 가득한 밥상
다낭에서 제일 맛있었던 밥상
추울때 들어가 먹은 청국장
망원시장에서 항상 이렇게 시킨 세트
친구가 우리를 위해 주문한 세 종류 김치
파리에서 나를 맞아준 밥상
마지막으로, 모든 이야기의 시작 꽁치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작가의 이전글 언어의 성차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