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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뿐사뿐 걷기 Oct 29. 2021

반려 식물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4

 가끔 이런 느낌 있지 않나? 평소에 자주 보고 듣던 말인데 어떤 날에는 이상하게 낯선 느낌을 주는 경우. 그 날은 가족과 나들이를 가던 중이었다. 경인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차 창밖으로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펼쳐지고 하늘은 저 멀리 하얀 구름만 드문드문 보일 뿐 쨍한 파란빛이었다. ‘이게 힐링이지.‘ 자연에 감탄하며 창밖을 보던 나는 돌연 나타난 무엇 때문에 당황했다. 초록 물결 사이로 천장이 2층 높이는 될 법한 건물이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건물 지붕의 한 쪽 면에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반.려.식.물. 그것도 사각 반듯한 고딕체의 단 네 글자. 


 ‘멀리서도 이렇게 크게 보일 정도면 글자를 도대체 얼마나 크게 썼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 이내 ’반려식물‘ 이라는 단어가 맞는 표현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온라인에서 가끔 보긴 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꽃과 나무를 사랑하고 키우시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아직 식물에서 위로를 받아본 적은 없어서 어떻게 식물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반려‘의 위치에 올 수 있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그저 화분을 팔아먹으려는 상술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넘기려는데 자꾸 ’반려‘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사전적 정의로 보면 반려(伴侶)는 ’짝이 되는 동무’다. 내게도 유일한 반려자인 남편이 있다. 30대가 지나고 나니 결혼과 출산, 육아 등의 이유로 몇 안 되는 학창시절 친구들과도 연락이 뜸해졌다. 이젠 깐부라고 부를만한 친구도 남아있지 않다는 현실을 자각할 때는 조금 쓸쓸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내게 ‘반려’라고 할 만한 대상이 남편 외에 또 누가 있을지를 따져보게 됐다. 나는 동물도 식물도 키우지 않으니 도저히 생명이 있는 것 중에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반려물(伴侶物)’까지 이르렀다. 생명은 없지만 내가 아끼고 가끔 위안이 되는 ‘물건’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한 번 곤혹스러워졌다. 자연스럽게 오래된 물건을 먼저 떠올리게 됐는데, 중학교에 올라가며 부모님이 사 주신 첫 영어 사전은 지금껏 나와 함께 하며 30여 년이 되었지만 그 사전이 나와 감정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또, 나름 내가 아끼는 물건들이 몇 가지 있다. 몸에 잘 맞고 촉감이 부드러운 니트는 입을 때마다 행복한 느낌을 주고, 손에 쏙 들오는 펜은 사용할 때마다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 분명 그것들 역시 내게 소중하고 만족감을 주고 있지만 ‘반려’의 관계에 놓을 수 있느냐 묻는다면 글쎄. 어딘지 2% 부족한 느낌이다. 뭐지? 나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건가? 물건에서 조차 반려의 대상을 찾지 못하자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차 창밖의 풍경은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소중한 물건들이고 잃어버리면 마음이 아프기도 할 텐데 나는 왜 그것들을 ‘반려물‘로 인정하는데 주저하는 걸까? 좀 더 특별한 의미나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방송으로 치면 찐한 사연 같은 거 말이다. 예를 들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전에 주셨던 선물이든(저는 양가 부모님이 다 건강하게 살아계십니다^^), 인생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와 함께 했던 것이라든가. 물건이 비싸고 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불러오는 어떤 특별한 기억이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참 자격조건 한 번 까다롭다. 나 원래 이렇게 깐깐한 인간이었나? 




 결국 물건에서 조차 반려의 대상을 찾을 수 없어지자 조금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동무’를 찾는 일은 체념했다고 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며칠 후, 불현듯 한 가지가 떠올랐다. 책에서 만난 인물들. 어린 시절부터 읽어왔던 동화나 소설 속 인물들은 가끔 오랜 시간을 거슬러 나를 찾아왔다. 아무런 계기도 없이 뜬금없이 데미안이 생각날 때도 있었고, 연금술사의 산티아고는 20대의 나와 꽤 오래 머물렀다. 자유로운 인생이 그리워질 때면 조르바의 대책 없이 솔직하고 열정적인 말투가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했다. 마치 멀리 여행을 떠났던 친구가 돌아와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는 것처럼. 그들이 찾아와 ‘우리가 있잖아’ 라고 말해주었다. ‘맞아! 너희들이 있었지.’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이제 당당하게 ‘야, 나도 친구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유일한 반려물. 책이 내게 그런 의미라는 걸 새삼 발견한 것은 꽤 기쁜 일이지만, 그렇게 찾고 찾은 결론이 겨우 책이라니 나는 참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요즘 인싸들이 하듯 개나 고양이 한 마리 정도는 키우며 집사가 되던, 반려 식물을 키우며 정원사가 되던 하면 좋으련만. 평소에도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점점 더 시대의 트렌드와는 멀어지는 것 같다. 이대로 아싸가 되는 것인가. 뭐 그렇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정말 마흔이 넘고 보니 ‘에라 모르겠다. 배 째!’라는 뻔뻔함이 생존 무기처럼 강해진다. 책에 낯가림도 있고, 정독하는 습관 때문에 다독도 못하는 사람이 책에 그런 큰 의미를 둔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자세로 책을 고르고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함께 걸어갈 평생의 친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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