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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뿐사뿐 걷기 Nov 10. 2021

애는 쓰고 있습니다만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5

 어느 가수의 에세이를 읽다가 마음이 무거워져서 잠시 책을 접고 몇 초 숨을 내쉰 뒤 다시 펼친 적이 있다. 글의 내용이 어둡거나 주제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서 작가의 애쓰는 마음이 느껴져서 읽는 나도 함께 마음이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이 짧은 산문을 완성하려고, 문장을 진행시키려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끌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참 애쓰고 있구나. 그 마음이 느껴져서 이 작가에게도 글을 쓰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물론 책 전체가 그렇지는 않았다. 아마도 잘 써지지 않는 날에 쓴 글이었으리라.


 몇 년 전, 동네 문화센터에서 바이올린을 잠시 배운 적이 있다. 학창 시절 리코더를 제외하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악기를 갖게 되었는데 그게 바이올린이라서 얼떨떨하면서도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수업도 즐거웠고 함께 수업을 듣는 일명 ‘동네 언니’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좋았다. 그날은 수업이 끝나고 원하는 사람들만 남아서 개인 연습을 더 하고 있었다. 각자 떨어져 자기 진도에 맞는 곡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연습을 하던 언니의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꽤 오랫동안 배워온 언니의 바이올린 소리는 굵고 곧고 묵직했고 연주는 매끄러웠다. 음이 흔들리거나 삑사리 나는 일도 없이 한음 한음을 정성껏 연주하는 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실없는 농담 한번 하는 일 없이 늘 진지하고 흐트러짐 없는 성격의 언니였는데 그 성격이 음악에서도 느껴졌다. 잠시 언니의 연주를 감상하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악보대로 실수 없이 연주되고 있었지만 한음 한음이 모두 무겁고 진지해서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할지 몰랐다. 소리에서 느껴지는 압력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싶은 것이지 연주자의 애쓰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연습이고 과정이니까 당연히 애써서 해야겠지만 그날의 연주를 듣고 ‘너무 애를 쓰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는 쓰지만 그 애씀을 읽고 듣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 들키면 아마추어니까. 바이올린이야 취미로 배우는 것이니 그랬다 쳐도 돈을 받고 방송 글을 쓰는 작가 생활을 열여덟 해나 하고서도 늘 애면글면한다. 사실 한창 이 일 저 일 한꺼번에 많이 하던 20대 30대보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아주 여유롭게 일을 하는데도 애는 더 쓰고 있다. 이틀 동안 밤을 새우며 완성한 원고를 전송하고 나면 밀려오는 허탈감과 아쉬움에 몸부림친다.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왜 결과물이 이렇지? 더 새롭게 안 되나? 나 늙었나? 방송 감이 떨어졌나? 체력이 달리나? 이런 자책과 의심을 반복하길 여러 번. 나름대로 이유를 고민해 봤다. 


 어쩌면 같은 휴먼 다큐 프로그램을 2년 이상 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매번 출연자와 상황은 다르지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무궁무진하진 않고 그걸 표현하는 언어 역시 한정적이니까. 100회를 한다고 100번 다 다른 표현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변명 같은 자기 위로를 해보지만 소용없다. 물론 이밖에도 이유는 더 찾아볼 수 있다. 아이템의 콘셉트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 주인공 캐릭터가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 구성이나 편집이 잘 정리되지 않은 경우. 모두 원고를 쓸 때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기깔나게 원고를 써낸다는 전설적인 작가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나는 전설이 아니니까. 


 너무 애쓰면서 일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이러다가 그나마 가늘고 길게 연명해 오던 방송작가 생명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일 못 해서 잘리는 사태보다 원고 쓰다 죽을 것 같아서. 제명까지 살다 가려면 내가 먼저 두 손 들고 그만두는 게 나을까? 가끔 생각한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생각을 몰고 가면 문득 정신이 번쩍 든다. 나 휴먼 다큐 좋아하는데.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도 휴먼 다큐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이 순간 나는 왜 도망치려는 거지? 




 ‘되게 잘하고 싶었나 보다...’ 


어느 날 살짝 스치는 마음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외부의 인정도 받고 싶고, 나 자신이 읽어봐도 꽤 마음에 드는 원고를 쓰고 싶었나 보다. 원고가 잘 써질 때는 영상을 틀어놓고 작성한 내레이션을 성우 속도에 맞춰 읽어보며 신이 났었다. 적당한 길이감으로 적절한 표현이라는 확신이 왔을 때는 밤을 새우면서도 대낮처럼 정신이 깨어있었는데. 요즘은 자꾸 머뭇거린다. 이 표현 말고 더 정확하고 트렌디 한 건 없을까? 이 상황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 게 적절할까? 그러다 보니 원고 쓰는 시간은 길어지고, 막상 완성된 문장에는 생기가 빠져있다. 그 머뭇거림의 원인이 어쩌면 내 욕심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너무 잘하고 싶어서, 너무 애쓰고 있구나. 모든 음에 똑같이 정성을 기울이던 바이올린 언니처럼 나도 너무 힘을 주고 있었구나. 내가 쓴 방송을 보는 시청자도 도망가고 싶어지면 어쩌지? 


 물론 애를 써야만 넘어갈 수 있는 순간도 있지만 매 순간 애를 쓰며 사는 일은 얼마나 피곤할까. 문득 막내 작가 시절에 함께 일하던 조연출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갑에 동성이기도 했고 방송국에서 함께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친하게 지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실수하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내가 안 돼 보였는지. 한밤중 텅 빈 사무실에 둘이 앉아있던 날, 내뱉듯이 나에게 말했다.


 “야, 강약 조절 좀 해.” 


뒤에 뭐라고 말을 더 붙였던 것 같은데 그 뒤는 기억이 안 난다. 내용도 표현도 너무 당돌해서 놀라다 못해 멍해졌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서두도 없이 날아들었던 돌직구 조언은 오랜 세월 각인돼 있다가 가끔 생각이 났다. ‘그래, 내가 강약 조절이 안 되긴 하지.’ 힘을 빼면 힘을 줘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될까 봐. 그래서 실수가 생길까 봐. 늘 긴장감을 안고 필요 이상으로 애를 쓰는 게 습관이 됐다. 마흔이 넘어서도 아직 그 균형을 못 맞추고 사는 것은 좀 유감스럽긴 하다. 40대의 저질 체력에 20대처럼 애를 쓰다간 남보다 빨리 황천길 가는 수가 있다. 뼈아프지만 그 친구의 조언은 마흔이 넘은 지금에서야 더 유효하다. 지금은 소원해진 그 친구가 나를 보면 이렇게 말하겠지. 


‘야, 너 아직도 그렇게 사냐?‘ 


가끔 싸가지 없이 말하던 습관을 그 친구 역시 고치지는 못했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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