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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뿐사뿐 걷기 Mar 24. 2022

고수를 찾아서

마흔 육아 일기

 ‘아차, 이분도 아니군.’     


손목시계의 뒷면에 찌이익-하고 기스가 나는 걸 보는 순간 알았다. 나의 마음에도 기스가 났다.     


 오래전 선물 받은 손목시계의 배터리가 다 됐다. 보통 금은방에서 함께 시계 약도 갈고, 수리도 해줬던 기억이 나서 집 근처 금은방을 찾았는데 잘 보이질 않았다. 여러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거리로 나가니 깔끔하게 새단장 한 액세서리 전문점이 보였다. 들어가서 물어보니 시계는 팔지만 약은 갈지 못한다니 난감. 어쩔 수 없이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에 있는 명품 시계 수리점이 나왔다. 내 것은 대단한 명품 시계도 아닌데 그런 고급 매장에 가는 게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할지 망설이는데 갑자기 요상한 상상이 발동했다. 동네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시계방에 고수가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든 것이다. 나는 보물 찾기를 하는 어린이의 마음이 되어 주변을 돌아다녔다.      


 근처를 둘러보던 중 의외로 정말 커다란 금은 도매상가를 발견했다. 내가 상상한 작은 시계방은 아니지만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널찍한 매장 안에는 유리 진열대가 쭉 이어졌지만 천장에는 각자 다른 상호명이 매달려 있었다. 대부분 목걸이, 반지 등의 보석류를 팔고 있었다. 나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매장의 직원에게 물었다.      


“저, 시계 수리하는 곳은 없나요?”     


 직원은 매장의 가장 안쪽 오른쪽 귀퉁이를 가리켰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조용히 앉아계셨다. 작은 유리 진열대에는 여러 종류의 시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나는 손목시계를 꺼내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는 뒤에 있는 작업대에서 연장을 챙겨 오셨다. 아주 작은 손 망치와 하나는 끝이 납작하게 눌려 도끼날같이 생긴 도구였다. 손때를 타 손잡이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연장을 보는 순간 아저씨에 대한 신뢰가 무한 상승했다. 이게 바로 전문가의 연장인가.      




 연륜이 묻어나는 지긋한 나이, 연장을 많이 다뤄 굵고 투박한 손을 가진 아저씨는 돋보기를 코끝에 걸쳐 쓰고, 작은 도끼날 같은 연장을 시계의 본체와 뚜껑 틈새로 밀어 넣으려는 참이었다. 장인이 출연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듯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아저씨의 손끝이 보였다. 잠시 후, 억지로 뚜껑 아래로 연장을 밀어 넣다가 그만 찌이익-하고 시계 뚜껑에 기스가 나고 말았다. 나는 얼른 실망감을 감추고, 민망해할 아저씨를 생각해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는 몇 차례의 실패를 거쳐 겨우 뚜껑을 열고 배터리를 교체했다.      


시계 뚜껑의 아래쪽에 넙적하게 기스가 몇 차례 났다


  다음은 시계줄을 바꿀 차례. 아저씨는 뒤의 서랍장에서 납작한 상자들을 꺼내더니 그 안에 들어 있는 시계줄을 보여주며 고르라고 하셨다. 내가 찾던 고수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판명이 되었지만 그래도 죽어있던 시계가 다시 생명을 얻었으니 목적은 이룬 것이라고 위로하며 흰색을 골랐다. 아저씨가 흰색 줄을 꺼내 한 쌍으로 포개져 있던 것을 벌리는데 가죽이 생선 비늘처럼 일어나며 벗겨지는 것이었다. 아저씨도 당황하고 나도 당황. 허둥지둥 상자를 다시 뒤지는 아저씨.      


“흰색은 이것밖에 없는데... 검은색은 어때요?”     


상자 안에는 꽤 여러 개의 줄이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어쩐지 유행이 지나고 낡아 보였다. 새것인 채로 오랜 시간 상자 안에 담겨있었던 시계 줄들. 빛은 차단되어 있었지만 시간까지 피해 갈 순 없었나 보다. 나의 눈치를 보며 은근히 시계줄의 상태를 살피던 아저씨. 말로는 골라보라고 하시면서도 검은색 가죽 줄 하나를 내밀며 어떠냐고 물으셨다. 아마도 그중 제일 상태가 좋은 거였나 보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어서 그냥 그걸로 하겠다고 했다. 


 위기를 모면한 아저씨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줄을 갈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 때 고전을 하셨던 아저씨는 줄을 교체하는데도 진땀을 빼셨다. 문득 내 시계가 좀 까다로운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 받을 때 매장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구매했다고 들은 아르마니 시계였다. 비싼 것도 아니고 디자인이 독특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사각의 시계인데 어떤 점이 저 아저씨를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고 조용했던 아저씨의 일상을 한순간에 긴장과 곤혹스러운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나는 최대한 아저씨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진열장 안의 시계를 구경하고 다른 귀금속 매장을 초점 없이 휘둘러 보았다. 이 불편한 상황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다 됐어요.”

“얼마예요?”

“2만 5천 원이요.”     


시계를 받고 카드를 드렸는데 아저씨가 또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혹시 현금은 없어요?”     


아저씨는 카드결제기가 없다고 하셨다. 아저씨 매장과 마주 보고 있는 귀금속 매장의 카드결제기를 빌려 2만 5천 원을 결재했다. 인사를 하고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손목에 두르려는데 손에서 끈적함이 느껴졌다. 방금 새것으로 바꾼 줄에서 허물이 벗겨지듯 비닐이 때처럼 밀려 나오고 있었다. 낮은 한숨이 나왔지만 다시 돌아가 환불을 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아저씨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시계에 기스가 생기고 2만 5천 원도 조금 아깝긴 했지만 내가 잃은 것보다 아저씨는 아마 더 많은 것을 잃었을 것 같다. 평소에 얼마나 손님이 없었으면 시계줄이 삭아서 가죽이 일어나고 벗겨지는 지경이 될 정도로 모르셨을까. 어쩌면 아저씨의 오늘 하루 중 내가 유일한 손님이었을지 모른다. 지갑도 없이 카드 한 장 들고 다니는 요즘 세상에 카드결제기도 갖추지 못한 아저씨의 변변찮은 가게 사정을 여과 없이 들여다본 것 같아 민망했다. 누구나 들키고 싶지 않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나는 허락받지 않거나 초대받지 않은 곳에 함부로 들어가는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장소든 마음이든.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아저씨의 남루한 속사정을 마주하게 된 것인데 가능한 한 못 본 척해 드리고 싶다.      


 그나저나 오늘 개봉한 상자 속 시계 줄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못 쓰게 돼 버린 시계 줄을 들여다보며 아저씨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그 시계 줄을 선 구입할 때 쓴 금액만큼 본전은 뽑으셨길 바란다. 뜬금없는 호기심으로 ‘동네 고수’를 찾아 나섰던 나의 일상 모험. 이번엔 실패로 끝났지만 어딘가에서 진짜 고수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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