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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Mar 16. 2024

두 번째 사춘기

'팬티! 두 치수 크게, 색은 두 종류, 오늘 꼭!'

나,


"엄마? 팬티가 하나도 없는데요?"

"서랍에 있잖아?"

"모두 삼각팬티잖아요?"

"아무거나 입어, 엄마도 지금 출근해야 해"

"팬티가 없어서 학교를 지각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엄마가 책임지실 거예요?"


나는 빨래를 제때 하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면서 동시에 벗은 속옷을 바로 세탁 바구니에 넣지 않은 나 자신에게도 조금 화가 났다.  평소 나는 팬티와 바지를 동시에 벗는 버릇이 있다. 혹시라도 바지 속에 팬티가 들어있을지 모르기에 찾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옷걸이에 걸린 바지 안쪽을 하나하나 뒤져보았다. 다행히 하루 전 입었던 바지 속에서 팬티 하나를 발견했다. 이럴 땐 팬티를 세탁 바구니에 넣지 않은 게 다행인가도 싶다. 

암튼, 개학날부터 입을 팬티가 없어 지각을 한다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첫날부터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긴 싫다.


몇 달 전에 바깥에 나갈 때 입는 팬티가 다 마르지 않아서 헤어드라이기로 말리느라 친구와의 약속을 한 시간이나 미룬 적이 있다. (이건 엄마가 몰랐는데 나중에 무슨 말을 하다가 알게 됐다)

친구들은 모르는 비밀인데, 사실 나는 집안과 집 밖에서 입는 팬티를 구분해 입는다. 이건 초등학생 때부터 내가 정한 규칙이다. 엄마는 처음엔 내가 구분해 입는지 모른 것 같다. 그냥 팬티를 자주 갈아입는다고만 생각한 것 같다. 엄마는 이 문제를 알고 나서는 바꾸려 애썼지만 몇 해 지나 보니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이젠 포기한 것 같다. 그럼에도 외출용 팬티와 실내 팬티를 구분하지 못하는 엄마는 어떤 날엔 외출용 팬티를 모두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나를 당혹게 한다. 사실, 이런 내가 비효율적이고 비정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이 자주 발생하는 건 아니라서 그다지 불편하진 않다. 굳이 불편함을 말하자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엄마의 잔소리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기억해 내자면 코로나가 시작되고 얼마 후인 것 같다.

아무튼 이 일로 나는 팬티가 많은 사람이 되었다.

이건 우리 가족만 아는 나의 강박 증상 중 하나다. 말하자면 나는 흔히 말하는 예민한 아이다. 



엄마,


"엄마? 팬티가 하나도 없는데요?"

"서랍에 있잖아?"

"모두 삼각팬티잖아요?"

"아무거나 입어, 엄마도 지금 출근해야 해"

"팬티가 없어서 학교를 지각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엄마가 책임지실 거예요?"


중학생이 된 첫날 아침부터 팬티 하나로 내가 아이와 실랑이를 하다니... 화가 나려 했다. 짜증이 섞인 말로 아무거나 입으라고 말하면서 아이의 옷장 서랍을 열어뒤적인다. 팬티가 여러 개 있다. 모두 작아진 삼각팬티에다가 실내용 팬티로 추정된다. 사실 아이가 실내외용 팬티를 구분해 입는 건  꽤 오래됐지만 어느 것이 실내용이고 실외용인지 나는 자주 헷갈린다. 같은 재질의 팬티인 데다 색깔만 다르기에 그걸 구분하려 애쓰지 않는 한 구분할 수 없다.  나이가 드니 기억했던 걸 자주 잊는 것도 있다. 어느 날은 외출용과 실내용을 정확히 구분하고 어떤 날은 그 반대로 말한다. 그냥 팬티를 넉넉히 사주고 아이가 찾아 입게 했다. 세탁기를 며칠 돌리지 않았더니 외출용 팬티가 모두 세탁 바구니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세탁 바구니에 있는 것은 절대 다시 입지 않는 아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옷걸이에 가서 바지들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뒤적였다. 다행히 외출용 팬티 하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첫날이니 교복 말끔히 입고 가자. 넥타이 매고, 조끼도 입고, 알았지?"

"네, 알았으니 엄마 먼저 나가요."


교복 입는 순서를 알려주었으니 모르지 않을 테다. 아이를 믿고 현관문을 나섰다.

운전대에 앉아 속옷 빨래를 미루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강박증상이 더 확장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불현듯 들었다. 오늘은 아이가 집에 오면 다른 불편한 문제는 없는지 좀 더 관찰해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폭풍 성장하는 아이의 팬티가 그렇게 꽉 끼는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에도 미안함이 들었다. 오늘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아이가 입는 똑같은 재질의 팬티를 두 치수는 크게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동을 켜고 휴대폰 메모장에 메모를 했다.


'팬티! 두 치수 크게, 색 두 종류, 오늘 꼭!'


작은 아이는 예민한 아이다. 팬티를 자기의 기준대로 입는 것도 예민한 아이의 특징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만의 규칙을 따라야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나는 큰 아이가 사춘기 때 어려움을 겪고 나서 예민한 아이에 대해 공부를 하고 나서야 예민한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자세에 대해 조금 알게 됐다. 

예민함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예민함을 조절하는 능력을 적절히 키우지 못하는 게 문제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러 부모와 부딪치는 것은 물론 당사자인 아이는 무척 힘들어할 수 있다.


큰 아이는 누구보다 예민한 아이였는데, 나도 그걸 모르지 않았는데 이제와 돌이켜보면 조절하는 법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니 중학생이 되면서 그걸 잘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자신의 기준대로만 하려 했고 감정의 기복이 커지면서 아이와의 충돌이 잦아지게 된 것이다.  

그런 아이를 아빠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아이로 단정 지었다. 나는 나의 양육 태도에 문제가 있었나, 하는 자책을 자주 했다. 그래서 늘 아이에게 미안했고 아이에게 낮은 자세를 취했다. 그런 내 행동 또한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리 만무하다. 사춘기의 특징과 예민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남편과도 자주 다투었다. 그것은 또 아이에게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큰 아이와의 사춘기를 지나는 몇 년은 어떤 사건이 생길 때마다 순조롭게 해결되는 일이 드물었다. 그야말로 사춘기 전쟁을 치를 때가 많았다. 


예민한 아이가 스스로는 예민하지 않다며 애써 자신의 특별함을 감추려 하는 것은 그 예민함을 드러내 존중받는 것보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니 큰 아이는 사춘기를 지나며 얼마나 힘들었겠나. 나는  그걸 알고 나서 얼마나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 후로 내가 기분대로 아이를 대하지 않았는지 자주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예민한 아이와 함께 사는 건 자주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객관화해 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고마운 건 이제라도 깨달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예민함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지 못하고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지 못하면 억압되었던 감정들이 사춘기를 기점으로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고 만다. 

나는 큰 아이가 사춘기를 지날 때 절실히 느꼈기에 작은 아이의 사춘기는 좀 여유롭게 맞이할 수 있었다. 작은 아이와 큰 아이는 성향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어려서부터 여러 행동들에서 말하지 않아도 예민함의 특성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작은 아이와 잘 부딪히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 아이를 존중해 주고, 오히려 아이의 긴장과 불안이 드러날 때 그 감정을 알아채서 완화해 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예를 들면, 언젠가 아이가 시험을 앞두고 불안해서 걱정하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답을 해줬다.

"어머니, 시험이 일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공부한 게 없어요. 어머니, 제가 20점 맞은 적이 있지요? 저 또 그러면 어쩌지요?

"그땐 그림 그리느라 수업을 거의 듣지 못한 상황이었지. 그 상황이라면 엄마라도 그랬을 거야. 지금은 열 흘이라는 시간이 있고 학원도 다니고 있으니  20점에서 점점 멀어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런데도 때론 기대한 것과 다르게 실망스러운 점수를 받게 될 때도 있지, 그런다고 너라는 존재가 어떻게 되지 않는단다. 점수에 너무 집착하며 공부하지 않길 바란다."

"그렇겠죠? 설마 또 20점대를 맞진 않겠죠? 그건 저도 확신해요!"

"그래, 그러면 된 거야."


그깟 팬티 실내외용으로 구분해 입는 게 대수인가. 그것 말고도 작은 아이의 독특한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감에서 거의 모든 것에 커다란 안테나를 장착한 아이다. 나는 그런 아이가 이젠 특별히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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