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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Mar 20. 2024

두번째 사춘기

안전신문고에 신고를 하다

나,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다 사거리 횡단보도를 다 건널 즈음 신발 앞코가 배수구 철망에 끼어 큰 '대'자로 엎어졌다. 옆에서 길을 건너던 아주머니가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 아팠지만 창피함이 더 컸기에 괜찮다며 얼른 일어.

내가 발이 걸린 곳은 횡단보도가 끝나는 지점, 배수구 철망이 일그러지고 몇 개 빠져 있는 도로와 철망의 경계다.  그 이빠진 철망에 신발 앞코가 걸린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 내가 휴대폰을 본 것도 아니고 한눈을 판 것도 아닌데 발이 걸렸다는 게 억울했다. 그렇다면 신발이 문제였을까...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내가 골랐던 스니커즈는 발이 더 큰 다음에 신자고 했던 엄마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어제는 안 넘어졌는데 오늘은 왜 넘어진 걸까...딛지 않아야 할 곳을 정확히 딛으면 넘어질 수 있다는 것,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그런 걸 느낀 것 같다. 내 잘못 없이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나는 옷이든 신발이든 마음에 들면 그것만 반복해 입거나 신는 버릇이 있다. 나는 보통 신발을 하나 사면 빗물이 스며들어올 때까지 신는다. 신었던 신발에 애착이 있어 버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크다. 그런 이유로 이전에 신었던 스니커즈를 두 번째 사게 되었는데 사이즈가 없어서 한 치수 큰 걸 신게 된 것이다.  엄마는 발을 위해 스니커즈보다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나는 스니커즈의 불편함을 모르겠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스니커즈를 신기 시작하면서 나는 스니커즈만 신게 되었다. 엄마가 아무리 운동화를 사자고 해도 나는 아직 그럴 마음이 없다. 나는 그냥 스니커즈가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도로가 파손되었는데 제때 고치지 않은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억울함을 토로할 사람은 늘 엄마, 나는 통증보다 억울함에 못 이겨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사거리 횡단보도 알죠? 거기 망가졌는데 누가 고치는 거예요? 왜 어른들은 도로가 파손돼도 나 몰라라 하는 거예요? 만약 어린아이였다면 발이 빠졌을걸요. 또 저 말고 누군가가 이미 넘어졌을지도 몰라요. 거기 파손된 지 아마 한 달도 넘었을걸요. 다리가 다 까졌다고요. 어른들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길에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요. (엉엉)"

"얼마나 다쳤는데? 걸을 순 있어?"

"네..."

"집까지 걸어올 수 있어?"

"네..."

나는 까진 무릎이 아픈 것도 아프지만 억울한 마음이 훨씬 컸다. 억울한 마음에 다시 뒤돌아서 내가 걸렸던 그 하수구 철망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나는 도로가 망가지면 바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도로 보수를 담당하는 어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몇 달 전 이태원 길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죽었는데도 어른들은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걸 보면 이쯤이야 대수겠나.

엄마는 그때 뉴스에서 피해자의 가족이 울분을 토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뉴스를 볼 때마다 개탄했다. 사실 나도 너무 놀라고 지금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길에서 사람이 사람 사이에 끼어 죽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내가 좋아하는 핼러윈, 친구들과 함께 사탕과 초콜릿을 나누는 것조차 괜히 죄스러워 그날 이후 내게서 핼러윈은 사라졌다. 그런 슬픔은 어른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더 화나고 슬프다. 


엄마,

학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운동화 앞코가 하수구에 걸려 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단다. 아이의 우는 목소리에 억울함이 가득하다. 아이가 넘어져 다친 곳은 사람의 통행이 많은 사거리 횡단보도와 인도가 맞닿는 지점이다.

아이는 내가 전화를 받자 다짜고짜 울분을 토했다. 도로에서 사람이 걸어가다가 구멍에 걸려 다치는 게 말이 되냐며. 아이 말을 들어보니 정강이에 타박상과 무릎 찰과상 정도로 다친 것 같았다. 나는 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었지만  걸어올 수 있다는 말에  크게 다친 것 아닌 것 같아 일단 안도했다.


잠시 후 아이가 자신이 다쳤던 바닥 구멍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아이 말을 종합적으로 듣고 판단한 결과 가로 한 뼘 반, 세로 5cm 정도 될 것 같았다.

아이는 만약 자신이 어린아이였다면 발이 들어갈 수도 있다며 누군가 자기처럼 또 넘어져 다칠 수 있다며 걱정과 억울함이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이런 건 어디에 말해야 고쳐주냐며 따지듯이.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억울함을 토로하 아이에게 진정하자고 달랬다.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이미 넘어진 건 어쩔수 없지만 앞으로 누군가 또 넘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문득 '안전신문고'가 떠올라 그걸 알려주었다. 이번엔 엄마가 신고를 할 테니, 다음엔 그런 위험한 곳을 발견하면 너도 신고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요즘 아이들은 인도든 횡단보도든 휴대폰을 보며 걷는 아이들이 많다. 어쩌면 우리 집 아이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다친 아이에게 그걸 물을 필요는 없다. 아이들도 휴대폰을 보며 걷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걸 자제하는 게 잘 안될 뿐이다. 아이가 설사 휴대폰을 보다가 넘어져 다친 거라면 이미 그것으로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밤 10시에 나는 휴대폰에 앱을 설치해 아들이 찍어 보낸 사진과 사고 위치를 캡처한 사진을 첨부해 안전신문고에 신고를 했다.

다음 날  우리 시에 신고 결과가 접수되었다는 알림 톡이 왔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며 신고가 접수되었으니 얼마간 기다리면 보수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후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소식이 없더니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2월 3일까지 처리기한이 연장되었다는 알림 톡이 왔다. 

그렇게 그 일을 잊을 때쯤 문득 사거리를 지나다 보니 말끔하게 보수된 배수구를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아이에게 할 말이 생겼다. 나는 마치 내가 수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봐! 고쳤지? 이제 누군가 넘어지지 않겠다."

"네... 근데 너무 늦게 고쳤어요. 그 사이에 누군가 또 다쳤을지 몰라요."

"그래. 행정이란 게 인력은 한정돼 있다 보니 위험도와 시급성을 따져서 먼저 하기에 그럴 수 있어. 거리 곳곳이 위험천만한 곳이 널렸을 테니 순차적으로 하다보면 그렇게 되는 거지."

"......."

아무튼 그날 이후 학원에 갈 때마다 그곳을 지나는데 한동안 왠지 아이와 내가 함께 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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