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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Mar 28. 2024

두 번째 사춘기

편의점 사장님

"낼 모의고사에 사인펜과 수정테이프 준비하라더구나. 형이 쓰던 거 있으니 그걸로 가져가도 될 것 같다."

"엄마? 그것은 형이 수능 볼 때 쓴 거가 아니에요?"

"그게 왜? 아무거나 쓰면 되지"

"아니... 형이 기념으로 두는 건지 모르잖아요? 게다가 허락도 안 받고 쓰는 건 좀... "

"형이 이거 사용했다고 뭐라 하진 않아. 그냥 쓰고 가져다 두면 되지."

"아니요! 저는 새 걸로 살래요."


아이는 학교에 다녀온 후 초저녁잠이 들어 저녁 8시에 일어났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사인펜과 수정테이프를 챙겨두라고 일렀지만 알았다고만 하며 방으로 들어가더니 바로 잠이 든 것이다.

8시에 잠이 깨서는 늦은 저녁을 먹고 9시가 다 돼 공부를 하겠다고 나가는 것이다.

나가는 아이 뒤통수에 편의점에 사인펜이 없을 수도 있으니 독서실 가면서 사인펜을 먼저 사라고 일렀다.


중학생 때 아이는 준비물을 종종 빠뜨려 당황하는 일이 있곤 했다. 그런데 그게  중학생 때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 짚어만 주고 그냥 두었다. 결국 당황했던 경험이 몇 번 있었지만 점차 나아지긴 했다. 적어도 자신이 못 챙긴 것에 대해선 책임을 질 줄 알게 되었고 엄마 탓을 하진 않게 된 것이다.


첫아이가 사춘기 때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내가 앞서 챙겨주고 혹시라도 깜박해서 챙겨주지 못하면 나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런 게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된다는 걸 깨달은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큰아이와 그걸 만회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첫 모의고사를 앞두고 늦은 시각에 아이는 컴퓨터 사인펜을 사러 나갔다.

하지만 아이가 나간 지 1시간이 되어도 카드 결제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아마 사는 걸 잊은 것 같다. 전화를 하려다가 그냥 두었다.



다음날 아침에 밥을 먹으면서 사인펜 챙겼냐고 물었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편의점 사장님 진짜 친절해요. 컴싸가 다 팔렸다고 하면서 아저씨가 쓰던 거 하나 있다면서 저에게 주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고마워서 음료수 하나 샀어요."

"그래 고마운 일이네"

"네, 맞아요. 공짜로 줬으니까요."

"..."

"편의점 사장님들이 다 친절한 건 아니에요. 편의점은 친절한 게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요. 편의점은 가까운 데를 가는 거잖아요. 6학년 때 제일 가까운 편의점에서 라면 국물 흘렸다고 욕먹은 적이 있거든요. 그 후로 그 편의점 가까워도 안 갔어요. 내가 흘린 게 아니고 바로 전에 온 형들이 흘린 건데 잘 알아보지도 않고 우리가 라면 국물 흘렸다면서 막 욕을 했거든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우리가 어리다는 이유로 화풀이 대상이 된 것 같아 엄청 화났었거든요."

"억울했겠네"

"네"

"근데, 기억나? 초등 2학년 땐가 실내화 가방 잃어버려서 그거 편의점 사장님이 한 달 동안 보관해 줬던 거. 그때 엄마가 편의점에 뭐 사러 갔다가 발견했잖아. 사장님이 애들이 보면 찾아가라고 애들 눈높이에 실내화 가방을 두었더구나. 그 편의점은 사라졌지만 그때 그 사장님이 다시 보이더라. "

"아, 맞다. 우리 미술 학원 1층 편의점 아저씨는 저를 알아요. 여름에 미술학원 다닐 때 매일 음료수나 간식을 사러 가니까 언젠가는 일요일인데도 학원에 왔냐며 물어보더라고요."


중학생이 되면 아이들이 가는 곳은 학원, 편의점, 분식집 정도로 제한적이다.  초등학생 땐 놀이터나 여행, 박물관 등 이곳저곳 다닐 기회가 있었지만 중고등학생은 대부분이 '학원 편의점 학교 분식집' 정도가 가장 많을 것이다.

놀기를 좀 좋아하는 아이들은 노래방, PC방, 친구 집이  들어갈 것이고,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독서실이나 학원이 더 추가될 것이다. 아이들의 동선은 도시와 농어촌이 좀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한 것 같다.


중3 때, 아이가 갑자기 진로를 예체능으로 정하면서 미술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그로 인해 몇 달간 끼니를 학원 주변 분식집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었다. 당시 도시락을 주문해 줄 수도 싸다가 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걱정이 돼 밥시간이 되면 카톡으로 한 끼 식사가 되는 음식으로 먹도록 말했다. 하지만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식사시간을 30분이라 밥이 되는 건 시간이 걸려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서 밥을 먹다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몰려 애들이 몰리면 시간은 더 지체된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천천히 먹고 수업 시간에 늦으면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께 방해가 되니 그것도 예의가 아니란 걸 아이 아는 것이다.

나는 그 학원을 당분간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다 내 아이만 식사시간을 더 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이니 부모로서 답답하기만 했다. 결론은 그냥 아침을 든든하게 차려주고 그 상황이 빨리 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내 아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좋은 입시 결과는 학원의 경제력 상승과 비례한다.  학원에서 시간을 계획할 땐,  아이들의 처지보다는 학원의 입장이 우선시되는 것 같다.  학원간의 경쟁, 부모의 불안 심리가 작용한 나머지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은 아이들에게 잘못된 식습관을 만든다. 결국, 인스턴트를 별로 먹지 않던 아이가 단짠단짠 자극적인 음식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요즘은 집에서 분식집이나 인스턴트 스타일로 음식을 해주길 바란다. 소스류를 첨가해 짜고 매콤하고 달게 만들어야 맛있다며 먹는 것이다. 잘못된 식습관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다. 아이들의 입맛은 거기에 길들여져 그게 옳지 않은 식습관이란 걸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아무튼 학원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숨통이 되어주는 건, 편의점과 분식집밖에 없는 것이다. 그곳에서 아이는 삼각 김밥이나 추로스 같은 걸 먹으면서 잠깐의 휴대폰 게임이나 유튜브를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가 만나는 어른 또한 굉장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그런 짧은 순간에도 어른들을 보고 판단하는 것 같다.  


중3 여름 방학에 아이가 학원 수업 쉬는 시간에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추로스를 종종 먹었었는데, 매번 음료와 추로스를 함께 주문하다가 하루는 추로스만 주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추로스 가게 사장님이 늘 시키던 음료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아이는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그냥 주는 거니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추로스 가게 사장님의 호의에 대해 말을 했다.

"엄마, 추로스 가게 아저씨는요. 양팔이 용 문신으로 가득해요. 근데 처음엔 뭔가 무서운 생각도 들었는데 그건 제 편견이었어요. 제가 자주 가니까 저한테 엄청 친절하세요."

"그렇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건 옳지 않지. 그전에 옳지 않은 일을 했다 해도  현재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을 편견의 시각으로 봐선 안 되겠지... 또 문신을 했다고 전부 무서운 사람도 아닐테고..."

"네"


아이들에게 중고등학생 시기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이 시기에 편의점, 분식집 이런 곳에서 자주 어른들을 만난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물건만 사거나 먹고만 가는 줄 알지만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렇지 않다. 어른들의 태도, 말들에서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배우기도 하고 잘못 행동하는 어른을 비판하기도 한다.

작은 친절에 고마워할 줄 아는 건 작은 친절을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이 많아야 한다.

학교나 학원같이 선생님만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상점의 주인을 통해서도 아이들은 친절을 배우기도 한다. 물런 그 친절이 모두 아이가 원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불편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거 알지?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아! 좋은 사람의 눈에는 좋은 사람도 더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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