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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Apr 06. 2024

두 번째 사춘기

우리의 사춘기

담벼락에 매달린 나무 그림자보다 더 그림자 같은 왈라비는 봄동을 입에 물고 햇살 찾아 빈둥거려요

수족관 속 출렁이는 햇살보다 수직의 햇살이 좋은 바다사자는 사육사가 던져주는 물고기에도 수염 하나 까딱 안 하고 너럭바위에 등을 대고 일광욕을 해요

아슬아슬 밧줄 사다리를 타고 오른 코아티는 우리 앞에서 자기를 찾지 못하는 구경꾼들을 구경하느라 흔들리는 밧줄에서 내려오지 않아요

눈을 감고 열을 맞춰 몸을 맞댄 열 마리 사막 여우는 모래에서 함께 무슨 꿈을 꾸는 걸까요...?

나뭇등걸에 기대어 졸고 있는 곰은 구경꾼이 던져주는 건빵 같은 건 쳐다도 안 봐요

쏟아지는 잠을 깨고 싶지 않은 눈치예요

동물원에선 모두가 봄을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주아주 느리게요.

우리도 왈라비 바다사자 코아티 사막 여우 곰처럼 여유로운 봄을 보내고 싶어요. 우리 밖에서.


사춘기는 봄을 생각하는 시기라는데 우리들의 사춘기는 봄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아요.

봄은 그냥 꽃 피고 날씨가 따뜻해지는 시기란 거, 동복이 더워지는 시기란 거, 학교만 다녀오면 곁땀으로 샤워를 해야 한다는 거, 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는 거, 그런 걸로 아는 것 같아요.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일주일 중 가장 행복하하는 시점을 토요일 저녁이라 했다는데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나를 비롯해 친구들 대부분은 그 시간에 학원에 있으니까. 이건 분명 청소년을 제외한 통계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청소년.


주말, 벚꽃 만발한 사월이 되니 어른들은 봄을 누리러 봄꽃 놀이 가고, 우리들은 중간고사 준비하러 학원으로 가죠.

학원 가는 길에 '카톡' 대학생이 된 형이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는 벚꽃 다발을 귀에 꽂고 입이 귀에 걸린 사진을 보냈죠. 괜히 얄밉죠.


사춘기, 12~18세, 할 일은 오로지 공부, 그것만이 목표인 것 같아요

학교라는 울타리는 우리가 된 것 같고

집이라는 울타리도 그와 다르지 않고

그것도 부족해 주말에도 학원이라는 우리 속에 우리를 가두죠

주말, 학원이 없을 때 친구와 가는 곳은

편의점 분식집 무인카페

쫌 노는 애들은 노래방, PC방

공부 좀 하는 애들은 독서실

운동 좀 하는 애들은 농구장, 헬스장?


하지만 발로 닿을 수 있는 그 어디도 여기 만큼은 아니죠

아주 쉽게, 아주 멀리, 아주 깊이 갈 수 있는 세상

그곳에서 어른들은 우리가 어떤 곳을 다녀도 잘 몰라요

어른인  해도 알아보지 못하죠

어딜 다녀왔냐고 묻지도 않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키득키득 웃음이 절로 나죠

우리는 그곳에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죠, 그곳은 사이버 월드

게임과 유머 숏폼, 내가 특히 좋아하죠

노력만 하면 레벨이 쑥쑥, 유머 릴스를 보다 보면 키득키득

그렇다면 이런 순간들이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은 행복한 것 같아요.

공부 압박감도 엄마아빠 다툼도 미운 친구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거든요.

근데 그 순간이 행복했다면 그 시간이 기억나야 하잖아요? 근데 그런 순간은 지나면 기억이 안나요.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구나, 라는 후회가 더 남죠. 엽기적인 것들, 좋지 않은 영상들을 본 날엔 괜히 마음마저 꺼림칙해요.

새벽까지 게임을 한 날은 다음 날 학교에서 더 많이 졸았죠. 게임은 할 땐 모르지만 하고 나선 엄청 피로가 밀려옴을 알게 됐어요. 기분도 몸도 찜찜한 느낌, 그런 건 진짜 행복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체육시간에 농구공 하나로 피구 공 하나로 게임보다 즐거웠던 기억이 있어요. 끝나고도 기분이 개운하고 친구들과 더 가까와진 것 같아요. 이런 게 진짜 행복이 아닐까요?


휴대폰은 우리들이 놀 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만들어주지 못한 어른들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주고 나니 좀 아닌 거 같거든요,  그러니 자꾸 그만하라고 하는 거죠. 그것은 너무도 강력한 즐거움을 주는 나머지 사이버 중독에 빠지게 되거든요. 그건 어른들도 다르지 않죠.

어른들조차 빠져드는 사이버 중독의 문제를 사춘기인 우리들이 스스로 헤어 나오긴 어렵죠. 어쩌면 그래서 학원으로 우리를 돌리는지도 모르죠.


학원에서 오늘 시험을 봐요. 중간고사 준비죠.

그리고 저녁에 무인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날 거예요.

실컷 수다를 떨고 우리들의 사춘기에 대해 얘기해 볼래요.

마음이 통하는 친구랑 실컷 수다를 떠는 건, 동물원 동물들처럼 느리게 봄을 보내는 방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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