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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Jun 15. 2024

두 번째 사춘기

나를 살게 한 너에게

정순이에게,

작약꽃이 피었단다. 작약꽃은 어스름 저녁엔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환해 보인단다. 작약은 분홍빛 등을 켠 것 같거든.


요즘 나는 공원을 산책할 때 자주 작약 밭에 머문단다. 그러면 내가 마치 너희 집 정원에 서 있는 것만 같거든. 너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지. 너는 작약을 닮은 것 같으니까. 작약꽃을 좋아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내게 작약꽃은 아름다움과 함께 가슴 저릿 감정이 솟구치게 하는 꽃이란다.


내게 있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약간의 슬픔이 묻어 있지. 그게 사람이든 식물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야. 나의 감정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슬픔. 너와 내가 만난 건 슬픔 그 자체이기 때문인 걸 알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작약은 너무 빨리 속절없이 진단다. 마치 너처럼.


5월이면 너희 집 담장 아래엔 작약이 탐스러웠지.

너는 담장 아래로 작약을 가득 심었지. 5월이면 꽃봉오리 작약을 꺾어 부엌 창가에 두곤 했지. 너는 고단한 네 일상을 꽃으로 위로받고 싶었을지 몰라.


그땐 그런 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내가 너를 닮아가는 것 같아.


내가 있는 공간엔 꽃이 아니라도 늘 푸릇한 식물이 있어야 하거든.


5월의 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색은 주황 그리고 분홍. 촌스럽지만 화려하지 않은 환한 색.


나는 네가 오일장에서 장미를 사와 수돗가에 정성을 기울여 꽃을 심던 날을 잊지 못한단다. 여름이면 웅크려 앉아 채송화 사이로 난 풀들을 뽑으며 웃던 네 모습. 채송화, 금잔화, 봉숭아, 분꽃을 키에 맞춰 가꿀 줄 아는 너. 가지, 호박, 토마토, 박들을 어우러지게 심을 줄 아는 너는 태어나기 전부터 정원사. 너희 집은 사방이 꽃과 나무들 천지였지.


종일 밭에서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치고 풀 뽑느라 고단했을 네가 꽃밭의 풀까지 뽑을 때면 안타깝다 생각했는데... 그치만 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일로써가 아닌 너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시간 말이야. 네 삶이 꽃밭의 꽃들처럼 가꾸어지길 바랐을 테지. 그래서 어쩌면 너는 너를 꽃들에게 투영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너에겐 그런 소박한 시간조차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지. 네 가정이 평화를 찾을 무렵 너는 몸져 누웠으니까. 마당에도 나갈 수 없을 정도의 힘만 남은 너를 보는 건 안타까웠어. 네가 많이 아팠을 때, 나도 돈을 벌기 시작했지. 나는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과 주황색 스웨터, 원피스를 사갔지만 너는 그런 것들이 소용없는 때가 되었지. 그런 것들이 오히려 네 처지를 더욱 슬프게 한다는 걸 나는 왜 알지 못했을까.


네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쉬운 것, '고맙다, 사랑한다'라는 말.


종종 너를 찾아갔지만 너에게 이 말조차 하지 못했단다. 네가 이생을 마치고나서야 너를 붙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던 거 같아.


그러지 못한 게 회환으로 남았지. 하지만 쉬운 말도 누군가에겐 가장 어려운 말이 되곤 하지. 내겐 그런 말이 가장 어려운 말이었던 거야. 배우지 못한 말들은 그래. 나는 그런 말을 배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늦게라도 배우고나면 그런 말을 할 줄 아닌 사람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알아. 그러니, 배워서 좋은 말은 빨리 배우는 게 좋은 거 같아.


"사랑한다. 고맙다. 괜찮아." 그런 말 말이야.


그땐 원망이 더 컸던 거 같아. '너는 왜 나와 함께 여행 한번 못 가고 이렇게 누워만 있는 건지... 왜 나는 너를 위해 내 젊은 시간을 오롯이 바쳐야 하는 건지..." 나는 그렇게 너를 원망할 때가 많았단다. 그래서, 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거 같아.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걸 나는 그땐 몰랐지. 사람의 목숨이 부질없이 멈춰진다 걸 몰랐던 때니까.


내가 본 네 삶은 늘 지쳐 보였어. 행복해 보인 적이 거의 없었어.


네가 행복해 보인 때는 새 집에서 화단에 꽃들을 심을 때, 그때뿐이었던 거 같아.


내가 춘천에 살 때 가끔 너를 찾아와 뭐 하냐고 물으면 너는 미소를 띠며 말했지.


'풀 뽑아야 꽃이 보이지 않겠니?'라고... 그러면 나는 옆에 앉아 함께 풀을 뽑곤 했지. 그리곤 가지며 호박을 따와 네가 해준 저녁 밥을 먹곤 했지.


네가 오랜만에 본 나에게 하는 말은 '잘 지냈니?'가 아니었지. 너를 떠난 나를 조금은 원망하는 눈빛 뿐이었지. 그러나 너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어. 그러면 내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걸 어쩌면 너는 알았는지도 몰라. 너는 내가 너처럼 살길 바라지 않았던 거야. 나와 함께 살고 싶으면서도 나를 위해 말없이 보내준 거지. 그게 너의 사랑의 방식이었던 거야. 내가 아이들을 양육해보니 네 마음을 조금 알겠더구나.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길 바란다는 마음. 그 마음을 말이야. 그걸 우린 희생이라 하지.


내가 너를 만나러 가면 네 얼굴은 까맣게 타 있었고 거기에 근심마저 가득했지. 나는 그런 네 모습을 보며 점점 슬픔을 키워왔는지 몰라. 그건 어쩌면 운명이겠지.


종이 인형처럼 살다간 네가 이생에 단 하루 다시 온다면 나는 너와 무엇을 할까? 나는 네가 생을 떠나고 나서 몇 번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어. 부질없는 상상이지.


그런데 나는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믿는 편이야. 조금 위험한 생각이지. 세상에 없는 네가 다시 살아올 리 없겠지만 나는 너를 만나려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지.


10년이나 모아서 작은 땅을 샀단다.


그 땅은 너의 땀이 스민 땅, 너와 내가 만난 땅. 기적 같은 땅이지.


골짜기 구름밭을 어디에 쓰려고 샀냐,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더라면 지금쯤 일을 그만두고 놀며 살 텐데... 주위에서 그런 말을 자주 들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땅을 산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나는 내가 만든 정원에서 너와 많은 이야기를 하는 상상을 하거든. 네가 좋아했던 꽃, 채소, 열매와 새들... 그런 것들과의 만남은 곧 너를 만나는 일이니까.


그 정원엔 네가 좋아했던 꽃과 나무를 심을 거야. 네가 좋아했던 꽃과 나무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같으니까. 날마다 새들이 찾아와 열매를 먹더라도 좋을 거야. 너라면 새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줬을 테니까.


나는 이제야 알아. 네가 너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행복을 찾아 떠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네가 만든 작은 정원뿐이었다는걸...


고단하고 두려움 가득한 세상에서 오로지 너를 달래고 위로할 곳은 정원뿐이었을 거야. 그 시절 네 것은 오직 꽃들과 나무밖에 없었지.


그런다고 네 삶의 고통과 두려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네가 가꾼 꽃들과 만나는 그 시간은 오롯이 너 자신이었을 테니까.


네게 있어 평온한 일상은 당연한 것이 아닌 끊임없이 움직여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


네가 나에게 준 것은 이것 하나,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 사는 것이 힘들다면 견뎌내야 한다는 것.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너만큼은 아닌 걸 알아. 나는 그걸 잘 아니까. 내가 가장 힘들었던 날도 지나 보면 너만큼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쩌면 죽고싶었던 몇몇 날들도 견뎌왔는지 몰라. 견디고 나니 고통의 날보다 평온한 날이 훨씬 많았고, 눈물나게 고마운 날들이었더라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이룬 것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배신하지 않아. 나는 그걸 너에게 배웠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가꾼 밭, 정원은 너에게 결과로 알려줬으니까.


무기력이라는 힘센 놈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네가 가꾼 꽃밭, 풀 한 포기 없이 가꾸어낸 구름밭을 기억해 내곤 해.


고마워, 너는 이생에 없지만 아직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단다. 나는 요즘, 몇 년 후 돌아가 내가 가꾼 작약밭에서 누구에게 편지를 쓰는 상상을 하곤 해. 그게 다음엔 네가 아닌 그 누군가여도 괜찮았으면 해.


너를 생각하며 작약꽃 앞에서 00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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