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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나무 Oct 12. 2024

두 번째 사춘기

죽었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스스로 죽은 게 아니라 내가 죽인 것일 수도

오래 키우던 식물 한그루가 죽었다. 줄기가 굵고 단단해 뽑히지 않아 잘라버렸다. 화분이 커서 둘 곳이 마땅찮아 빈 화분을 거실 한 켠에 오래 방치하고 있었다. 이듬해 봄에 나비란이 바닥까지 치렁치렁 늘어져서 그 빈 화분 위에 나비란 화분을 얹어두었다. 그리고 서너 달 지났을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될 무렵, 더위를 앞두고 내 몸도 무기력해지던 시점이었다. 무더위와 갱년기가 함께 시작될 땐 무더위로 축 처지는 건지 갱년기로 늘어지는 건지 분간을 하기 어려운 것처럼 나비란이 습도 탓인지 양분이 부족해 시들어 늘어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내 몸도 여름철 나비란처럼 축 늘어지던 날이다. 물을 줄 때가 훨씬 지났음에도 나는 부러 물을 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식물에게 조차 관심을 주지 않는 때는 많이 지치는 시기라는 걸 안다. 나비란이 처지다 못해 잎맥을 중심으로 오그라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물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물을 좋아한다면도 죽기 직전까지 방치하기도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다행히도 이렇게 두었던 식물은 나를 알기라도 하듯 대부분 살아난다. 오히려 그 시간을 이겨내고 더욱 단단하고 푸르게 잎을 뻗는다.  커피나무의 모든 이파리가 완전히 차렷자세가 된 후에야 물을 주는 나. 가끔은 내가 마치 식물에게 부러 고통을 주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실 나는 물을 준 후 드라마틱하게 변화한 모습을 보는 것을 즐겨하는 것도 같다.


암튼, 흙만 남았다 생각한 빈 화분 위에 올려 둔 나비란 화분에  물을 주려고 욕실로 옮기려는데 나비란 화분이 있던 자리에서 엄지 손가락만 한 뾰족한 새싹 두 개를 발견했다. 흙을 파보니 죽은 식물(이름을 잊음, 이름도 잊었으니 사랑했다 말할 수도 없다)을 잘라낸 줄기에서 싹이 난 것이었다. 제법 튼실했다. 나는 뿌리째 뽑아 흙을 털어내고 빈 병에 꽂았다.


그날, 그 새싹을 빈 병에 옮기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죽었으면 하는 존재를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기도 한다. 마음으로 수십 번 죽이기도 한다. 눈에 거슬리는 것을 보지 않는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어둠에서도 생명의 씨앗을 품고 햇살을 마주할 날을 위해 인고하는 것이 생명이 있는 것들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 자라주지 않는 식물이 나는 차라리 완전히 시들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결국, 죽었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스스로 죽은 게 아니라 내가 죽인 것일 수 있겠다.'


시계를 돌려, 봄으로 돌아가 내가 그 식물을 잘라내던 때의 마음은 어땠는지 떠올려보았다.

나는 물을 줘도 시들어가는 그 식물이 더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을 짓고 가차 없이 잘라낸 것이다. 그날, 내 마음은 무기력한 나를 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해를 식물에게 대체한 것이 아닌가. 일기를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나를 못마땅해했던 날이다. 내가 애정해서 가장 마음에 드는 화분에 손수 심었던 그 식물이 몇 년째 자리만 차지하고 앉았던 모습이 돌연 미워졌던 것이다. 자주 돌보지 않아도 쑥쑥 키를 키워 생명력을 전하는 드라코, 계절마다 반짝이는 잎을 새로 꺼내는 커피나무, 날로 풍성해지는 나비란과 너무 비교되는 그 식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애정을 주었는데, 아니 내가 사랑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주었는데 만족해할 만하게 자라주지 않는다고 미워하지 않았던가. 내가 준 것만큼 내게 적어도 표현을 주어야 하지 않았나... 적어도 그 반 만은 주어야 하지 않나.. 우리는 살아가며 친구, 연인, 가족 관계에서 아닌 척 하며 그런 기대를 하며 산다. 그것이 진짜 사랑이 아님에도 우린 '적어도 사람이라면... 최소한은... 도리상...' 등등의 단어를 갖다 붙이고 거래를 한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인 Y대 대학생이 연인을 살해했다는 뉴스를 본 날,  동네에서 중학생이 학원 옥상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아이로부터 들은 날, '자살'에 대한 연수를 받았다. 이하 연수에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청소년 자살은 결국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식물의 한살이를 알고 있음에도 식물의 안위를 부러 살피지 않고 방치하여 죽은 식물은 스스로 죽었다 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 사회, 가정은 청소년의 고통을 알면서 너무 오래 방치하여 자살률을 줄이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 있다 보면, 또 내가 아이 둘을 양육하며 마주하는 학교와 입시정책을 학부모 입장으로 보면 청소년 자살률의 감소를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청소년 사망 원인 1위 자살,

896명(2019년), 중학생 때는 여학생이, 고등학생은 남학생 자살률이 더 높은 편이다.  

10대 자살 현황 추이를 보면 인구 10만 명당 2015년 4.2명에서 2019년 5.9명, 성별에 따른 자살률 변화는 2015년 남자가 많았으나 2018년을 기점으로 여자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교통사고보다 더 많은 사망자 자살, 우리나라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대략 이러하다.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과도하면서도 관용적인 음주 문화(술과 자살은 연관성이 매우 깊음), 생명존중의 문화 조성을 위한 노력부족, 언론의 역할 등도 원인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많은 자살 이유에, 어른들의 안타까운 시선에 '음주'라는 것이 빠져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 사회는 술의 해로움을 알면서 동시에 술을 예찬한다. 모든 미디어와 일상에 술이 녹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나라 자살률은 술과 인과관계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술은 사고 뿐 아니라 자살에도 영향을 미치니 술이 사회의 뿌리 깊은 악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곤 한다. 나는 살면서 술이 본인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처럼 대부분의 자살은 처음부터 자살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촉발 계기가 생기면 구체적인 고민과 계획을 시작할 수 있으며, 자살 사망자의 약 40배~100배는 자살 시도자

1명이 자살로 사망할 경우 최소 6명~8명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러니 한 명의 자살은 주변인들에게 심각한 심리적 외상을 남길 수밖에 없다. 청소년이라면 더욱 큰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청소년 자살의 특징은, 충동성인 경우가 크다고 한다.

뇌가 미성숙하여 과도한 스트레스 및 외부자극을 받게 되면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질 수 있으며 한순간 도피를 위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충동적 행동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때조차 주변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정신적 질환이 주요 원인이 아니라 가정환경(가정불화) 대인관계 학업문제 등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 및 위기감 때문인 경우가 큰 것이다.

청소년은 다양한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이기에 자살 시도는 도움 요청, 심적 고통 호소의 극단적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문제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다.

또, 자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수 있는데  죽음을 비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사후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 부활에 대한 환상,  유명인의 극단적 선택이 청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이 시기는 또래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또래 간에 의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감 및 영향을 하다가 동반자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보통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야 죽음에 대한 개념이 확립된다. 따라서 어린 자녀가 '죽고 싶다'는 말을 할 때 '너무 힘들다'는 호소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니 죽고 싶다는 아이를 무시하거나 야단치면 절대 안 된다. 아이들은 괴로운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 때, 자해 행동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니 성급히 아이들을 훈계하려 들면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 선생님과의 소통을 통해 아이를 파악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부분에 관해 대화를 해보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절망적인 생각을 하는 아이들의 징후는 이러하다.


식사와 수면습관이 변합니다.

식사를 잘하지 못하거나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짜증이 늘고 침울하고 우울해 보인다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태도와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두통 복통 소화불량 등 신체 증상을 호소

일기장이나 SNS에서 죽고 싶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지각 등교거부를 한다

평소 즐기던 활동에 흥미를 잃거나 사람들과 만나기를 거부하고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집에서 대화를 거부하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을 수 있다

사후 세계를 동경하거나 자살한 사람들에 관련한 이야기를 한다

자기 비하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기 주변을 정리하고 평소 아끼던 소유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신체에 상처를 입히는 위험한 행동을 보인다

방에 혼자 있으려고 하면서 인터넷 검색을 자주 한다.


많은 부모가 일시적인 스트레스 신호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아이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심각한 행동으로 연결되기도 한다고 하니 주의를 갖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죽음에 관한 표현이나 자해 행동을 하는 것은 '힘들어요. 도와주세요'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그러니,

내 아이를,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비판하지 말고 마음으로 귀 기울여주길 바란다.


근래, 초등학교에도 자해, 자살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너무 슬픈 현실이다.


단 한 사람의 관심이 자살을 막지 않던가. 적어도 아이들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를 묵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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