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초부터 고독한 어린이였다. 시쳇말로 뼛속까지 아싸였다. 생에 가장 혈기왕성했으리라 짐작되는 유년시절까지도 나는 지독하게 말이 없었다고 한다. 아빠가 진심으로 둘째 딸의 발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내내 말이 없고 조용했던 어린이는 사람들이 붐비는 공간에서는 항상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를 그 누구보다 먼저 발견해내고는, 조용히 안심하며 자리를 잡는 일에 도가 튼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래서였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다. 상황을 예로 들면 이랬다. J라는 사람과 세 번째로 만나게 되었다고 하자. J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것이다. 어느 도시에서 자랐는지, 현재 어느 동네에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등.
하지만 나는 묻지 않는다. 나의 대부분의 말들은 J가 물어오는 것들에 충실히 답하기 위함일 뿐. 묻지 않는 내게 J는 서운함을 느낀다. 나는 그런 J를 이해하지 못한다.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내 곁에 잠시 머물렀던 수많은 J들은 거의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증발해버렸다. ‘묻지 않는다는 건 관심의 부재를 증명하는 거야.’ 라거나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너에게 더 이상 다가가고 싶지 않아.’ 라거나 하는 말들을 소리 없이 내뱉으면서. 사실 나는 조금 느리거나 두려웠을 뿐이었는데.
자연스레 사람은 내게 언제나 난해한 책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언젠가는 가까웠으나 한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멀어져 버린 친구, 그리 친하지 않지만 매일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눠야 하는 동료, 도통 이해하기 힘든 유머 코드를 지닌 누군가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어렵다.
그 시간들 속에서 다소 난해한 이야기들을 꾹 참고 읽어내며 꾸역꾸역 페이지를 넘겨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페이지에 빽빽하게 들어찬 새까만 글자들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짓눌리며, 그 빈틈없음에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에 눈을 감아버리는 나.
그러나 초인적인 힘으로 다시 눈을 부릅뜨고 내 앞에 펼쳐진 글자들을 힘껏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