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유진 Jun 16. 2021

유서

2021년 6월의 글쓰기 모임에서 쓴 '죽음'에 대하여

**해당 글은 글쓰기 모임에서 주어진 주제에 관하여 쓴 습작입니다.


소란스러운 흐느낌들이 잦아들고 까마득한 정적이 권태롭게 흐른다. 나의 죽음을 말하는 의사 선생의 윤곽이 점점 옅어진다. 내 손을 고이 어루만지던 누군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죽어가는 나는 이 모든 광경을 두 눈에 차곡차곡 담는다. 명멸하는 의식과 서서히 드리우는 어둠. 이렇게 나는 32년의 생을 마감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남겨져 더 많은 날들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이른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지막 사진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내 휴대폰의 사진 폴더에 프라하의 작은 카페에서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의 유리꽃병과 잔잔히 흐르는 음악. 하트 모양 라떼아트가 그려진 커피를 받아들고서 잠시나마 멈춘 시간을 음미하던 순간들.

    

그림동화 같은 거리 구석구석의 아름다움을 가득 담은 유리창을 가만히 응시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나. 그 사진은 신혼여행을 위해 떠난 프라하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과 행복을 가득 담고 있다. 그 날의 행복했던 기억들만은 오롯이 이 세상에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이다.    


죽어버린 나는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한다. 장례식은 굳이 필요치 않지만, 어쩔 수 없다면 조용하고 간소하게 치러주길 바란다. 장례식은 살아남은 슬픔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장례식에 쓰이는 꽃이 생화가 아니라고 해서, 관이 향나무가 아닌 오동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지인들이 보내준 화환의 수가 많지 않다고 해서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기를.     


마음껏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고 슬픔을 꾹꾹 눌러 앉히지 않아도 괜찮은, 나의 죽음만을 위한 비일상적인 공간이 마련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통장 잔고와 대출이 조금 남은 우리 집을 남긴다. 시간이 흐른 후에도 우리가 자주 갔던 카페에서, 늘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공원 길목에서, 꺼내 읽어줄 이를 잃은 채 켜켜이 쌓인 먼지도 내치지 못하고 힘없이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에서, 일상의 곳곳에서 문득문득 아내의 부재를 맞닥뜨려야 할 남편. 나로 하여금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딸 콩순이에게는 염치없지만 아빠를 잘 부탁한다고 전하고 싶다. 엄마를 조금 빨리 떠나보낸 아빠의 슬픔을 위로해주기를. (언젠가 아빠가 엄마가 아닌 새로운 사람을 콩순이에게 보여주려고 할 때, 콩순이의 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을 보여주며 힘껏 으르렁대는 것을 잊지 않도록.)    


이기적이고, 슬픔과 우울을 오가며 내내 혼란스러웠던 나를 버텨준 많은 이들에게 마지막 감사를 건넨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아니, 더 없이 좋은 삶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일개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