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키코치 Sep 26. 2021


내 명함은'자녀 경영가'입니다.

내가 45년을 살아오면서 가장 오랫동안 몰입해서 한 일은 '자녀를 키우는 일'이다. 16년간 해온 이 일에 나는 '육아'라는 이름 대신 '자녀 경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자녀를 키우며 살아온 나의 인생이 가장 때깔 나는 스펙이다.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떤가? 내 삶의 주인인 내가 인정해주면 되지.   

  

 나는 '혜영', '다은' 두 기업을 경영하는 C.E.O '참써니'이다. 


우리 기업을 잠시 소개하자면 기업명은 '도키교육'이고 도우며 함께 키우는 교육을 의미한다. 기업 미션(Mission) 은 ' 세상에서 참 빛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자' , 기업 비전 (Vision)은 '육아는 최고의 자기 계발이다.' , 핵심가치는 'WIN - WIN'이다.     



대한민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엄마'라는 직업은 정말 극한직업이다. 이건 답도 없다. 끝도 없다. 아이 손을 잡고 미로를 헤치며 달려온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내 옆에 없다. 난 무엇을 위해 달려온 것인가. 정말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내게 주어지는 건  허무함 뿐이다. 그럼에도 달려야 한다.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이를 찾아서 손잡고 다시 달려야 한다. 왜? 난 엄마니깐. 그리고 불안하니깐...     


우리는 2020년에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을 겪었다. 아이들이 매일 학교에 다니던 일상이 무너졌다.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고 기다리던 우리는 지쳐갔다. 학교를 다니던 일상이 일탈이 되었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하는 생소한 경험이 일상이 되었다. 난 오늘도 두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고 있다. 


7년간 일하던 직장을 재택근무로 전환하고,  집에서 아이들을 지켜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과 온종일 함께하니 아이를 키워온 지난 16년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키워온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자녀 경영가'라는 마인드가 없었다면 난 지금, 이 순간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도 저렇게 규칙적이고 바른생활을 하며 지내는 게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이후 아이들이 밤낮이 바뀌어서 힘들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우리 집과는 거리가 먼 얘기이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던 때와 똑같이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고, 줌 수업에 충실히 임하고, 제시간에 밥을 먹고, 공부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반면 스마트폰 사용량은 엄청나게 늘었다. 카톡, 웹툰, 웹소설, 유 튜드 시청 등 폰에 스며드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사는데 이마저도 안 하면 아이가 무슨 낙으로 사나 싶어 적당한 선에서 허용하고 있다. 2호는 스마트 폰이 없는 대신 컴퓨터로 유튜브를 한 시간 정도 시청한다. 유튜브를 모르던 아이가 줌 수업을 하며 드디어 유튜브에 눈을 떴다. 

     

우리 집 1호는 현재 중3이고, 2호는 초4이다. 나는 두 딸을 키우는 엄마이다.


1호는 작년에 맞이한 코로나 덕분에 '중2병'을 무사히 넘겼다. 중2병이 오면 정말 쿨하게 맞짱 뜨려고 많은 책을 읽고, 나름대로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집에만 있으니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만약 내가 자녀 경영의 마인드로 공부하며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갱년기를 앞둔 엄마와 사춘기 딸의 살벌한 동거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녀를 경영한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자녀를 경영하게 된 계기는 육아가 너무나도 처절한 전쟁터 같았기 때문이다.     


난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힘들었다. 즐겁지 않았다.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내가 누려오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아이 맞춤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아이를 쳐다보면 너무 예뻤지만 그건 잠잘 때 얘기고, 눈 뜨고 있는 동안은 악동이 따로 없었다. 생후 110일까지 내 품에서만 잠을 잤고, 두 돌이 넘도록 유모차, 카시트에 앉힐 수가 없었다. 아빠도 거부할 정도로 낯가림 심했고, 민감한 청각을 가지고 있어서 늘 조심해야 했다. 예민함의 끝판왕이었던 1호를 키우고 숨 좀 돌릴 때 태어난 둘째는 더 가관이었다. 예민한 아이 밑에 까칠하고 감성 충만한 아이가 태어났다.   

  

한마디로 성질 지랄 맞은 아이. "너희들 도대체 누굴 닮은 거니?"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아이들이 잠들면 혼자 엉엉 울었다.     


이 시절의 나를 붙잡아준 건 신앙과 책이었다.      


엄마 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던 나에게 책은 교과서였고, 스승이었다. 수많은 육아서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골라냈고, 나의 교육관과 비슷한 책은 파고들었다. 결이 비슷한 저자가 부산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저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이렇게 몇 년간 열심히 공부하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이렇게 힘든 아이를 주셨나? 그럼 이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이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인 거네! 그러던 중 아이들은 내가 경영해야 하는 기업이라는 문장과 마주했다. "자녀는 나에게 주어진 기업이며 상급이다."


 '기업'. 기업이라는 단어가 엄청 크게 보였다. 순간  '자식이 기업이었구나! 기업이라서 이렇게 힘든 거였구나!'라는 깨달음이 생겼다.  순간  뉴스에서 봤던 기업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늘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계시던 분들의 모습. 한 기업을 경영하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가?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온 사람들이다. 순간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삶을 배우면 나도 성공한 기업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대로 그냥 나 편한 대로 대충 살면 내게 주어진 두 기업이 부도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두 아이를 경영하는 경영가가 되자! 절대 부도내지 말고, 잘 키워서 세상에서 참 빛이 되는 사람으로 키우자!’ 이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육아는 더 이상 '힘듦'이 아닌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는 과정이 나를 잃어가는 과정이 아닌 최고의 자기 계발 과정으로 다가왔다.


마음 하나 바꿨을 뿐인데, 내 삶이 바뀌었고,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뀌었다. 나의 꿈을 정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하루가 설렘으로 다가왔다. 힘든걸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는 건 마법과 같은 일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 육아 16년 했더니 '브런치 작가'가 되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