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여성연극제 서포터스] 연극 '기억의 지속'
※ 이 연극은 제9회 '여성연극제'에서 공연된 작품입니다.
※ 연극 '기억의 지속'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K-장녀라는 말이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장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녹록지 않다. 어려서부터 남자 형제들보다 의젓하고 차분해야 하며, 여자답게 조신하면서도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억척스러운 면도 보여야 했던 그녀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부장제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모 세대로부터 희생과 책임감이라는 이중의 짐을 떠안아야 한다.
연극 '기억의 지속'은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인화가 치유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노부부와 그들을 돌보는 딸 인화의 이야기이다. 아버지 병구완에 지친 인화는 합리적 이성으로 억압하고 있던 내면의 상처 입은 어린 인화를 만난다. 어린 인화는 현실 원칙에 의해 부정되고 열등함으로 치부되어 숨죽이고 있지만, 실은 일상 현실을 끊임없이 작동시키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유품을 정리하며 과거와 현재 모든 인물들이 등장하여 함께 어우러진다.
인화는 집안이 몰락한 것도 오빠가 죽은 것도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여기며 아버지가 자신을 불행의 씨앗으로 여기고 미워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픈 아버지를 성심성의껏 돌보는 것도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감정을 잘 억제해 왔던 인화는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해지면서 전환을 맞이한다.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인화가 기억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연명 치료를 결정해야 할 때, 인화는 복수하듯 아버지의 치료를 중단하자는 이야기를 꺼낸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인화의 죄책감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인화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가 고이 간직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상장을 발견한다. 사실은 아버지가 자신을 많이 사랑했다는 어머니의 말에 인화는 무의식 속에서 아버지와 재회한다. 이때 인화는 두 개의 커다란 짐을 겨우 옮기고 있다. 그녀에게 지워진 '죄책감'과 '희생'이라는 버거운 짐이었다. 무의식 속에서 아버지는 인화에게 깨달음을 전해준다. 네가 들고 있는 짐은 너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그러니 내려놓아도 된다고.
한국임상연극심리치료협회의 산하 단체인 극단 우로보로스의 작품 '기억의 지속'에는 극의 주요 내용에 심리학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를 봐야 한다는 것, 기억은 때론 왜곡된다는 것, 아픔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 트라우마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 떨쳐내면 비로소 홀가분해진다는 것 등.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내용이지만 유쾌한 음악과 춤으로 균형을 맞추어 기분 좋게 공연장을 나올 수 있었다. 주연 인화 역할의 간미연 배우의 내면 연기도 괜찮았지만 특히 아버지 역할의 오일영 배우과 어머니 역할의 송숙희 배우의 노부부 연기가 무척 좋았다❤️ 이어지는 다음 공연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