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건축 스케치
뉴욕의 가장 웅장한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의 계단에 앉아있다가 문득 눈에 띄는 건물을 발견했다. 노르스름한 대리석으로 된 건물들 사이에 혼자 붉은 벽돌을 하고 있었고,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는지 궁금함을 자아내는 아기자기한 유럽풍 장식들을 뒤덮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를 마주하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 명당 자리에 앉아있는 이 건물은 벤자민 듀크 하우스(Benjamin N.Duke House)라고 한다.
보자르 건축 양식 Beaux-arts
1899년 부터 1901년 사이에 지어진 이 건물은 Welch, Smith & Provot이라는 건축 회사에서 디자인하였는데, 외관은 보자르 양식으로 디자인 되었으며 인테리어는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로 디자인되어있다. 보자르 (Beaux-arts)양식의 건축이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발전한 건축 양식으로,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Ecold des Beaux-arts)에서 가르치던 전통 건축 양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 양식은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원칙을 따르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적 요소들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철과 유리 등 근대적 재료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하였으며 이 당시 지어진 미국의 대규모 건축물, 공공 건물과 박물관, 도서관, 청사 등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뉴욕의 건물로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이 있다. 뉴욕의 거리를 매력적이며 풍부하게 하는 요소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고전 양식의 건물들과 현대 건물들이 교차하며 보이는 풍경이 아닐까.
Fifth Avenue의 유일한 도금시대(Gilded Age) 저택
이렇게 다양한 양식의 건물이 정해진 순서 없이 교차하는 거리의 모습을 볼 때면, 뉴욕의 거리는 마치 여러 시대의 책들이 마구잡이로 꽂혀져 있는 어떠한 책장같다. 벤자민 듀크 하우스와 같은 이렇게 화려한 양식의 건물들이 지어진 시기의 뉴욕은 어땠을까.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미국의 역사상 도금시대(Gilded Age)라 불리는 시대에 속한다. 이 시기는 1865년 남북전쟁 이후 1873년에 시작되어 불황이 오기 전 까지 미국의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한 시기를 일컫는다. 1865년에는 브루클린 브릿지가 지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수화기, 전구, 교량 등 현대 미국 도시의 화려함이 탄생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황금만능주의의 팽배, 거대기업의 독점, 철도건설을 둘러싸고 생긴 정경유착의 관행 등 부패와 타락의 어두움이 있었다. 도금시대(Gilded Age)라는 명칭은 바로 이렇게 겉은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빛나는 듯 하지만 속은 그렇지 못한, 그 시대를 풍자하는 명칭이다. 마크 트웨인과 찰스 더들리 워너의 공동 집필 소설인 “The Gilded Age : A Tale of Today”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이 소설은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사회상을 고발하며 부패하고 타락한 미국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쓰여진 소설로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한 정치 풍자적 소설로 평가받는다.
벤자민 듀크 하우스는 이 도금시대에 지어진 저택들 중 Fifth Avenue 에 유일하게 남은 저택이다. 이미 잘 알려져있다시피, Fifth Avenue는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부유한 집들이 많이 위치해있고, 일명 명품거리, Millionaires’ Row등으로 불리며 그 화려함으로 명성이 높다. 이를 고려한다면 벤자민 듀크 하우스는 미국의 사치스러웠던 시대와 그 당시 스타일을 대변하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건축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까지의 여정
앞서 본 사실로 보아 벤자민 듀크 하우스는 물론 역사적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출물이지만, 부동산적 가치의 측면에서 탐이 날 수 밖에 없는 완벽한 위치에 있다. 이 낮고 오래된 건물이 개발자들의 손에 의해 허물어지지 않고 보존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자본주의의 땅인 맨해튼에서 이 작은 저택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현재 벤자민 듀크 하우스는 뉴욕시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가 역사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이 랜드마크로 지정되기까지는 이 집을 지키려는 듀크 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 담배 산업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벤자민 뉴턴 듀크(Benjamin Newton Duke)가 1901 이 집을 구매하였고, 이후 그의 동생과 아들을 거쳐 벤자민의 딸인 메리 릴리언 듀크와 그녀의 남편이 이사와서 살았다. 메리가 1960년에 사망한 이후, 그녀의 딸인 메리 세만스가 가족의 집을 이어받았다.
1970년 초반, 부동산 투자자인 솔 골드먼(1970-80년대 뉴욕에서 가장 주목받던 부동산 투자자이자 크라이슬러 빌딩을 보유했던 자산가)과 도널드 주커라는 인물인 Fifth Avenue의 1006번부터 1008번 주택들과, 82번가의 주택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25층 아파트를 짓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벤자민 듀크 하우스는 Fifth Avenue와 82번가가 만나는 모서리에 위치한, 이 개발 대상의 주택들 중 하나였다.
메리 세만스는 자신의 가문의 역사가 담긴 이 집을 팔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 아니라, 이 집을 랜드마크로 지정하여 보존하기 위해 뉴욕 랜드마크 보존 위원회(LPC)에 청원을 넣었다. 그녀는 무려 1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으로 이 집을 매각하겠다는 지속적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다. 이 외에도 당시 Fifth Avenue의 건축물 보존을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Neighborhood Association to Preserve Fifth Avenue House”라는 시민단체가 1006번과 1007번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 두 건물은 결국 철거되고 말았다.
이후 1974년, 뉴욕 랜드마크 보존 위원회는 벤자민 듀크 하우스를 개별적인 랜드마크로 지정하였지만, 시민단체는 랜드마크 보존위원회가 그 해당 블럭 전체를 뉴욕 역사지구로 보존해야한다는 청원을 무시했다며 소송을 걸었다. 그 해에 주 법원은 랜드마크 보존위원회에게 적어도 공개 청문회를 통해 이 제안을 다시 검토할 것을 요구하였다.
78번가부터 86번가 사이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저택을 보존하기 위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역사지구(Metropolitan Museum Historic District)계획의 지정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1975년, 벤자민 듀크 하우스의 바로 옆 건물인 Fifth Avenue 1008번 건물은 철거되었다. 그 해 9월, 드디어 1009번 Fifth Avenue, 즉 벤자민 듀크 하우스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역사지구의 일부로 지정되었다.
벤자민 듀크 하우스의 현재와 미래
이렇게 제대로 된 랜드마크 보존 계획이 수립되기까지 동시대에 건축된 이웃 저택들이 무너지는 것들을 보며 벤자민 듀크 하우스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메리 세만스는 이후 노스케롤라이나로 이주하여 더이상 뉴욕에 거주하는 가족이 없게 되자, 2005년 이 집을 내놓았다. 그 당시 이 집은 뉴욕시에서 두 번째로 가장 비싼 집으로 소개되었고, 4천만 달러에 Carols Slim 이라는 맥시코의 부호에게 팔렸다. Carols Slim 은 2015년에 이 집을 8천만 달러에 내놓았는데, 이 가격은 뉴욕시에서 가장 비싼 공개 매물 중 하나였다. 2023년 현재, 이 집은 같은 가격에 다시 시장에 등장하였다.
듀크 가문은 더이상 이곳에 살지 않지만, 이 집은 문화재로 보존되어 역사적 가치를 간직한 듀크 가의 유산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외관을 철거하거나 변경하는 것에 제약이 많기 때문에, 추후 갤러리나 미술관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아직 이 건물의 공중권(개발되지 않은 공중의 연면적을 다른 필지로 팔 수 있는 권리)은 다른 필지로 팔리지 않았다. 자칫 삭막해져버릴 수 있었던 Fifth Avenue의 코너를 장식해 주고 있는 이 건물의 미래와 그 공중권의 잠재력이 가져올 이 지역의 다이나믹한 개발 모습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