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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덕호 Sep 23. 2024

뭐가 됐든 다 같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집 개와 고양이, 그리고 작업실의 동물들


작업실의 공동 점유자들


나는 제주도에서 가구 만드는 일을 한다. 작업실은 구좌라는 읍단위 동네에서도 인가가 드문 중산간 지역에 있다. 여기에 혼자 처박혀 작업에 골몰하는 게 일상이라 사람 만나는 일은 드물다. 그래도 나의 사회활동은 생각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그 규모가 일반적인 것보다 지극히 미세한 편이기는 하다. 


공방은 높은 풀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철골 구조에 샌드위치패널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단열이나 기밀과는 거리가 멀다. 밤이고 낮이고 수많은 (비인간) 방문객들이 틈새를 비집고 찾아든다. 약속을 잡는 일 없이 주로 기거나 날아서, 기척도 없이 쳐들어온다. 나는 떠돌이개나 새, 곤충 따위를 보면 부질없이 말을 걸거나, 먹을 것을 줘 보거나,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하므로 이것이 생각처럼 공포스러운 상황은 아니다. 


따지자면 그들의 활동 영역 한복판에 어느 날부터 이 창고건물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겸허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수풀 속 공방의 작은 손님(동물이나 벌레들이 아니라 나를 칭함)을 몰아내지 않고 무심히 반기는 이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따로 머리를 맞대 정하진 않았으나, 가급적 각자의 생활에만 충실한다는 불문율 아래 동거를 이어간다. 때로는 화들짝 놀라게 하거나 소소한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딱히 나쁜 의도는 없으리라 믿는다. 


이들은 주로 생존을 위한 활동에 분주하다. 쏘다니며 먹이를 구하거나 소리를 내서 짝짓기 상대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가구를 만드는 것도 (완성품을 팔아서 먹을 것으로 교환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하나 더 끼어있기는 하지만) 일종의 먹이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다들 비슷한 처지이다. 종이 다른 각 개체들의 생활은 땅따먹기를 하듯 한정된 자원에 금을 긋는 것보다는, 온전한 상태로 서로 겹쳐 있는 것 같다. 커다란 피자를 크고 작은 부채꼴 모양으로 간신히 잘라 나누는 게 아니라, 공평하게 한 겹씩 쌓아 올린 크레이프 케이크나 밀푀유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늘 달콤하지는 않다. 각 층의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모양도 들쭉날쭉하다. 각자가 준비한 시트는 너무 제각각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공이 배를 산으로 올려 보낸 이야기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역시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 거대한 케이크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나는 그냥 그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층은 늘어나고, 나날이 숨처럼 부풀어 오른다! 




개와 고양이가 있는 방


공방에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었고, 아내도 있다. (별 뜻 없는 가나다 순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반려동물을 만나는 것도,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주로 인간 외의 동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지금은 없는 고양이는 향년 21세의 나이로 먼저 떠났다. 내 인생의 절반 가량은 같이 살았다. 작년 일이었는데, 그새 나만 고양이 없다고 외치기엔 너무 매정한 듯해서 아직까지 어영부영 있는 둥 없는 둥 하고 있다. 


가구학교를 졸업하며 본격적인 가구 제작자로서 만든 내 첫 작품은 그 고양이를 위한 것이었다. 작품설명은 ‘현대 가정의 동물들은 제외되지도 않고 포함되지도 않은 채 인간 본위의 주거 공간 속에 얹혀 존재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고양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책상을 중심으로 한 반려동물 가구였다. 책상에 앉아 일할 때, 손 닿는 곳에 고양이를 올려두고 수시로 쓰다듬을 수 있게 했다. 온전히 고양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집사의 욕망을 현실화한 작품이었지만, 서로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방이라는 인간 중심의 공간에 겹쳐 있는 개나 고양이 (또는 햄스터, 금붕어, 장수풍뎅이…)의 생활이 있다. 같은 장소에서 살아가며 각자의 동선은 켜켜이 쌓여간다. 이 활동들이 오버랩되며 작은 방은 원래의 부피 이상 입체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특히 고양이의 동선은 수직으로 자주 교차하므로 더욱 재미있다. 책상이나 의자, 선반과 같이 다른 용도를 가진 사람의 가구는 고양이 앞에서 계단의 층계가 된다. 본디 용도보다는 상호 간 고저와 배치가 더 의미 있다. 같은 공간, 같은 물건이라도 다른 레이어에서는 하는 역할이 다르다. 우리 집 고양이가 오랜 시간 만들어낸 한 꺼풀은 지금은 희미하게 비활성화된 상태이지만 분명 그 자리에 남아있다. 


개는 열 살이 조금 넘었다. 고양이와는 달리 바닥에 해당하는 평면 하나만을 주요 무대로 사용한다. 바깥에 나가서 산책을 하므로 두께에 비해 면적이 상당히 넓다. 배변은 꼭 실외에서 하므로(개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내가 늦게 귀가하는 날에도 꼭 산책은 시킨다. 작업이 몹시 고되었던 날에는 개가 나를 끌고 간다. 자전하는 지구에 줄을 매달고 그 거대한 힘에 딸려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개가 먼저 침대를 차지하면 허리가 삐뚤어진 채로 구겨져서 자야 한다. 배변 후에는 똥을 줍는다. (아직 개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뼈다귀 모양의 간식을 꺼내 준다. 이 모든 행동들은 서로의 생활이 중첩되며 입체감을 가지는 순간들이다. 




공방에서 마주친 생물들


어디가 됐든 공동의 공간을 점유하는 생물들이 있다. 각자의 생활이 겹쳐 쌓이며 그곳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각각의 레이어는 너무 선명하지 않고, 오래된 셀로판지처럼 반투명한 상태이다. 이 상태로는 굳이 서로의 면이 맞붙어있지 않더라도 오묘한 색으로 병합될 수 있다. 어떤 것은 독특한 무늬를 가지고 있어서 생각지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개체들이 자신이 속한 생활범위를 다른 층과 무한히 평행한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서로의 층을 확인하는 조우의 순간이 있다. 수풀 가운데 위치한 내 작업실에서는 그 빈도가 조금 잦은 느낌이다. 외곽의 공방이든 도심의 아파트에서든 모두의 생활은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공방 앞마당에서 새나 개를 줍기도 하고, 벌레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아스팔트 바닥에 납작하게 눌어붙은 개구리나 뱀의 사체를 볼 때도 있다. 꿀벌이 열심히 모아둔 꿀을 빼앗거나, 조금은 다시 나눠주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무료한 노동자의 오락에 가깝다. 작업실에서는 크게 재미를 느낄 만한 자극적인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이 활동들에 대해 다소 가볍게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히 귀여운 동물들 (그리고 곤충들) 사진을 많이 꺼내놓고 싶다. 




고양이를 위한 가구들
생각이 많아 보였던 고양이
반면에 생각이 없(어 보이)는 개
개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릴 줄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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