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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덕호 Sep 24. 2024

새를 보거나 줍는 일상

팔색조, 섬휘파람새, 제비, 직박구리


동물의 숲


오늘도 발에 채이는 꿩들을 피해 무사히 공방에 도착한다.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습니다) 다양한 새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제주살이가 마음에 드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 작업실에 이르는 마지막 4킬로미터가량은 우거진 나무들이 노변까지 꽉 들어찬 양방향 일차선 도로이다. 습지보호구역인 선흘곶자왈 인근에서 구간이 시작된다. 이 일대는 화산폭발 후 흘러내린 용암이 판형으로 굳어 물이 고이는 특이한 지형이라고 들었다. 넓은 습지가 조성되어 곳곳에서 연못을 볼 수 있다. 


근처에 동백동산이라는 곳이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상록활엽수림 지대라고 한다. 물을 머금은 땅에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열매를 맺으니, 생물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나는 새나 다른 동물들로 태어난다면 여기에 눌러앉기로 진작에 결정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현생에 나쁜 짓 하지 않고 덕을 많이 쌓을 것이다. 




성숙한 어른의 포켓몬고


동백동산을 대표할만한 새를 꼽자면 긴꼬리딱새와 팔색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름철새인 이 두 종의 새는 각각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형만 보더라도 전설의 포켓몬 같은 아우라를 풀풀 풍긴다. 


다양한 색깔의 깃을 가진 팔색조는 조그맣고 귀엽다. 영어권에서는 페어리 피타(fairy pitta)라고 부르고 학명은 피타 님파(pitta nympha)인데, 둘 다 요정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 위대한 매력은 학식과 대륙을 뛰어넘어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지저귀는 소리조차 맑고 청명하다. 숲에서 길 잃은 인간을 유혹하려는 악한 영혼이 있다면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작은 팔색조의 모습으로 분하길 권한다. 


긴꼬리딱새는 수컷의 기다란 꼬리깃으로 유명하다. 이 꼬리깃은 번식기가 끝나면 빠져버린다고 한다. 수집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레어템이다.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감히 로또 2.5등 수준의 행운이 주어진다면 이것을 줍는 것으로 대신해도 될 것 같다. <동물의 숲> 같은 게임 속이라면,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긴꼬리딱새의 꼬리깃을 주웠다! 오늘은 행복한 날~!’ 같은 메시지가 흘러나오리라. 캐릭터의 능력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인벤토리에서 수시로 꺼내 들여다보고 싶은 아이템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긴꼬리딱새를 목격한 적이 없다. 올해 여름도 지났으니 내년을 기약한다. 목격 또는 관찰한 새가 어떤 종에 속하는지 정확하게 구별하여 이름 붙이는 행위를 동정(identification)이라고 한다. 조류도감과 망원경을 차에 넣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미지의 새들에 대비한다. 동정이 완료된 종은 도감에 따로 표시해 두는데, 하나씩 채워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것이 (매년 생일선물로 닌텐도 스위치를 기대하는) 성숙한 중년의 동물의 숲이고 포켓몬스터다. 




물새의 지오메트리


새를 볼 때면 학부시절 읽었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이 해변을 걷다가 새소녀(소설에서는 ‘기묘한 아름다움을 가진 바다새로 변해버린 소녀’라고 표현했다)를 동정, 아니 목격하는 순간이다. 바다새 소녀는 경이로운 인간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그 모습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깨닫는 계시를 얻는다. 나는 이게 새들의 주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제주에서는 차를 몰고 조금만 나가면 도심지의 비둘기마냥 무리 지어 있는 다양한 바다새들을 볼 수 있다. 바위 위에 올라가 날개를 활짝 펴고 젖은 깃을 말리는 가마우지나 왜가리, 쇠백로, 해오라기 같은 새들을 연안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겨울철 철새도래지에서는 멸종위기종인 저어새가 주걱 같은 부리로 바닥을 휘저으며 먹이활동을 하는 진귀한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물새들은 수면을 이등변삼각형으로 가르며 전진하거나, 동심의 원을 수없이 그려내며 갈퀴질한다. 어느 순간 물속으로 자맥질하거나 솟구치기도 한다. 특히 목이 긴 물새들을 보면 구동부위의 기하학적인 움직임이 감탄스럽다. 머리가 먼저 전진하고 z자로 꺾인 목의 순차적인 움직임에 따라 몸통이 뒤따르는데, 가구의 경첩처럼 절묘하게 움직인다. 한 걸음씩 바닥을 조심스럽게 디뎌가며 신중한 얼굴로 먹이를 노린다. 매서운 표정의 진지한 사냥꾼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관찰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에 부리를 잽싸게 처박은 왜가리가 허탕을 치기도 한다. 부끄러워서인지 한동안 나오지 않는 장면에 실소하기도 했다. 보기와는 달리, 다들 서툴게 살아가는 걸까?




작업실에 들어오는 새들


공방 입구는 커다란 슬라이드문이라서 열어두면 가끔 새들이 안까지 들어온다. 대개는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방향을 바꾸지만, 특히 어린 새들은 들어왔다 다시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도 있다. 나는 대체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지만, 외부 일정이 있거나 새들이 지쳐가는 게 보이면 어쩔 수 없이 막대라도 들고 얼른 쫓아내야 한다. 어리바리하며 구석으로만 파고드는 곤줄박이 유조를 잠자리채로 포획해서 밖에 놓아주기도 했다. 


여름철 작업실에 가장 자주 드나드는 손님은 제비다. 제비는 지극히 단정한 외모와 함께 뛰어난 비행능력과 사냥실력을 겸비하고 있다. 제가 살 집도 알아서 잘 짓는다. 잊지 않고 고마움을 넉넉히 갚는 자세(박흥보 씨 사례), 자신을 돌보기보다 측은한 이들을 우선 살피는 성품(행복한 왕자 사례) 등 배울 점이 참 많다. 보통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다니는데, 한 마리가 나가는 길을 못 찾고 헤맬 때는 다른 한 마리가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길을 알려주기도 한다. 둥지를 틀 곳을 찾는 듯한데, 작업실은 천장이 높고 외부와 단절된 느낌도 크게 들지 않으며, 비를 피하기에도 적합해 보인다. 나는 제비가 드나드는 철이 되면 혹시 공방 안에 집 짓기를 시작하지는 않는지 늘 경계한다. 나에게는 아직 세입자를 들일 여력이 없다. 

 



새를 줍는 일상


초여름의 공방 주변은 새소리로 가득 찬다. 박하게 잡아도 대여섯 종은 될듯한 각기 다른 새들의 소리가 겹쳐 들린다. 이 엄청난 생명력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란! 새들은 작은 체구에 비해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낸다. 새끼가 자라 둥지를 떠나는 이소철에는 특히 시끌벅적하다. 비행 요령이나 바깥세상에 대한 주의사항 따위를 가르치는듯하다. 이 시기에는 새를 줍는 일이 잦다. 땅에 떨어진 아기새를 발견하면 주변에 어미새가 데려갈 수 있게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게 우선이다. 차가 지나다니거나 사람의 손을 탈 것 같으면 근처 나무에 올려두기도 한다. 


제주에서 처음 주운 새는 섬휘파람새였다. 직장인 시절이었는데, 퇴근시간 무렵 건물 입구에서 발견했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은듯했다.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당일 구조는 불가능하다고 해서 집으로 데려왔다. 이것저것 줘 보았는데 잘 먹지 못했다. 내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눈만 깜빡였다. 유튜브에서 휘파람새 소리를 찾아서 들려줬다. 그러자 방 안이 가득 울릴 정도로 크게 삑, 소리를 내서 이제야 살아난 줄 알았다. 그러나 끝내, 다음날 구조대에 인계하기 전에 눈을 감았다. 


어느 날에는 작업실 앞에서 직박구리가 비행연습을 하고 있기에, 나가지 못하고 안에만 머물렀다. 어느 순간 빽빽거리는 소리만 크게 들려서 살펴보니 새끼 한 마리가 홀로 떨어져 나와 있었다. 가만히 두고 지켜보는데 풀숲에서 슬금슬금 접근하는 고양이가 있다. 근처에서 고양이를 본 적이 드문데, 소리를 듣고 귀신같이 찾아왔다. 쫓아내도 그때뿐이라 하는 수 없이 새끼를 안으로 들여왔다. 집으로 데려가 하루 먹인 뒤, 다음날 구조센터에 인계했다. 직박구리는 흔한 새라 구조대상이 아니라고 듣기도 했는데 이른 시간부터 와서 데려갔다. 


까치가 직박구리 둥지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어미새가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나중에 혹시 땅에 떨어진 새끼라도 있나 나무 밑을 뒤적거렸다. 겨울까지 빈 둥지만 남았다. 


몹시 더웠던 날, 아스팔트 도로 위에 새들이 널브러진 것을 보고 차를 돌렸다. 두 마리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모양이었다. 길 위에 오래 머물 수 없어서 급히 수습해 왔다. 한 마리는 이미 죽어 덤불에 묻어줬다. 숨이 붙어있던 다른 한 마리는 물을 주고 그늘에 두었더니 정신을 조금씩 차렸다. 구조센터에 연락하고 기다리던 중에 날개를 퍼득거리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자 온전히 힘이 붙어 날아다니기에 숲으로 돌려보냈다. 둘 다 어디서든 여태 잘 날고 있을까?




도감에는 새 그림이 가득해서 어딜 펼쳐도 좋다. 자주 보는 것은 <한국의 새>와 <야생조류 필드 가이드>
아파트 옆 하천의 새들. 뒷베란다에서 물총새의 사냥을 관찰하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우아하거나 귀여운 바다새들
본의는 아니겠지만, 신세를 청하는 빈도가 잦은 직박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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