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타일 디자인 스튜디오 파이브 콤마(Five Comma) 인터뷰
RboWXX는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만들어나가는 알보우의 작가 콜라보레이션 라인입니다.
파이브 콤마는 21년 10월 RboW의 첫 전시인 'Night & Forest' 에 <어둠 속에 잠긴 숲> 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3월 RboWXX 전시 <MONOCHROME> 에 2m가 넘는 패브릭 월 작업으로 참여하는 등 알보우와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화창한 볕이 들어오는 파이브 콤마의 작업실에서 정혜진 작가를 만났습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파이브콤마는 다양한 소재의 탐구로 수공예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한 질감의 텍스타일을 선보이며, 한 가지 주제에 매몰되지 않은 다양한 설치미술 작업을 통해 직물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텍스타일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또한, 직물이 ‘사용성’을 넘어 하나의 오브제로 존재하고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양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원래 회사를 다니시던 디자이너셨는데,
이렇게 독립적으로 수공예적 기반의 스튜디오를 운영하시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원래 회사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근무했는데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도 재밌었지만 다 만들어진 뒤에 공간을 꾸미는 것에 더 큰 재미를 느꼈었어요. 어쨌든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회사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여기서 평생은 재밌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회사에서 10년을 더 일한다 해도, 내 대각선에 앉아 계시는 이사님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일 다일텐데 내 인생이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건 제가 원하지 않는 삶이었어요.
그렇게 퇴사를 결정하고, 구체적인 계획 없이 미국으로 떠났어요. 몇 군데를 돌다가 포틀랜드로 갔는데 거기서 직조 틀을 구매하게 된 게 파이브 콤마의 시작이었어요. 회사 생활을 할 때도 코디네이션에 흥미를 느끼면서 텍스타일 브랜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규모가 큰 인테리어/공간 디자인을 할 때는 디자인 시점과 결과물을 볼 수 있는 시점 간 갭이 있고, 또 여러 사람과 업체가 함께 하기 때문에 제가 그렸던 모습대로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직조를 기반으로 한 텍스타일 작업은 제가 생각했던 걸 그대로 구현할 수 있고, 제 손으로 만들어가며 바로바로 완성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너무 매력적이고 저에게 잘 맞았어요.
본격적으로 파이브 콤마를 만들고,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죠.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을 하면서 면과 형상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수행하는 마음도 들 것 같아요.
하하. 저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 작업을 선호해요. 여러 브랜드, 기관들과 협업하며 정해진 기간 안에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작업 대비 기간이 촉박해도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거든요. 오히려 데드라인 없이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벽에 부딪힐 것 같아요. 아마 제가 평소에도 저만의 루틴이 있는 걸 좋아하는 습관이 작업 스타일에도 반영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웃음)
그럼 작가님만의 하루 루틴이 있나요?
일정이 너무 타이트하지 않다면, 오전은 웬만하면 오롯이 저의 시간으로 쓰려고 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볍게 1시간 정도 러닝하고, 작업실로 오면 여기저기 놓인 화분들 물부터 줘요. 그러고 작게 나있는 문을 열어두고 그 앞에 앉아 커피 마시면서 책도 읽고, 30분이라도 멍 때리다가 늦은 아침 겸 점심까지 먹으면 저만의 오전이 끝나요. 그 뒤에는 작업실에 꽤 오래 머물며 쭈욱 작업하는 편이에요.
파이브 콤마를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지속하기 위해서 이 루틴은 꼭 지키려고 해요.
특별한 루틴은 아니지만, 이런 시간 없이 계속하다가 보면 번아웃이 오는 것 같아요. 번아웃은 ‘나'에게 소홀할 때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파이브 콤마를 시작하고 몇 년은 휴가도 없이, 그 많던 취미도 거의 없어질 것처럼 작업만 했었어요. 나를 위한 시간이 하나도 없었던 거죠. 그러다 어느 날 노래를 들으려고 하는데 무슨 노래를 들을지 모르겠는 거예요. 노래도, 영화도, 책도, 제가 뭘 좋아했더라?,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꽤 오랜 시간을 ‘나'라는 사람 없이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예전에 사용했던 아이팟, 옛날 영화 등을 다 찾아보면서 다시 회복해갔던 것 같아요.
루틴도 반복할수록 탄력이 생겨요.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하나씩 클리어했을 때의 성취감도 있고요. 익숙하고 반복적으로 하는 작업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제 성향에서부터 비롯된 것 같아요.
직물용 실 외에 점점 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 같다.
최근에 발견하신 새로운 재료와, 그러한 낯선 재료로 작업하실 때의 어려운 점이 있을까요?
구리선으로 작업할 때 다른 직물과는 달라서 꽤 어려웠던 것 같아요. 물성 자체는 딱딱한데 또 얇게 뽑은 선은 딱딱하지 않아요. 컨트롤이 되는 것 같다가도 금속 자체의 탄성 때문에 제가 의도한 대로 쉽게 모양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위빙과 태피스트리를 기반으로 수공예적 직물을 탐구하고 계십니다.
재료 본연의 조화를 직조 방식을 통해 표현하신다면, 이미 만들어진 직물(패브릭)을
사용하실 계획도 있으신가요?
직조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물성의 직물을 만드는 것이 제가 파이브 콤마를 이어나가는 핵심이에요.
조합되는 소재나, 소재 간의 비율, 교차되는 순서만 달라도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게 너무 재밌고 신선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직물 자체를 사용하기보다 새로운 직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계속할 것 같아요:)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을 하고 계신데, 가장 기억에 남는 협업은 어떤 것이었나요?
운이 좋았던 것 같은데, 이제껏 협업 시에 소통했던 담당자분들이 다 너무 좋으셨어요. 그래서 진행했던 모든 협업이 다 즐거웠지만, 특히 사람과 과정에 대한 기억이 선명한 협업이 있어요. 퇴근하시고도 작업실에 오셔서 함께 노동요 고르고 밤새 저를 도와주셨거든요. 고생을 웃음으로 나눈 그 시간이 떠오르네요.
알보우에서 가장 좋아하시는 제품은 어떤걸까요?
캔들을 너무 잘 사용하고 있어요.
제가 우디한 향을 좋아하는데, 알보우의 향은 다 좋아서 2개를 같이 쓰고 있어요.
작가님의 취향이 더 궁금해져요. 저 곳에 LP가 많은데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
음, 계절마다 다른데요, 봄이나 여름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을 듣고 가을이나 겨울엔 벤자민 클레멘타인(Benjamin Clementine). 토로 이 모아(Toro Y Moi)의 음악을 많이 들어요. 이제 가을이잖아요, 벤자민 클레멘타인을 찾을 때가 됐네요.
앞으로 시도해 보고 싶은 작업이나 재료가 있나요?
제가 꾸준히 해오던 작업, 즉 새로운 물성을 부여한 직물에 기능을 담고 싶어요.
저는 소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물성이 아닌 직조를 통해 새로운 물성을 가진 직물을 만들어내고 싶은데, 처음에 파이브 콤마 시작할 때 생필품과 같이 기능이 있는 작업을 하려니 제약이 많더라고요. 일상에서의 사용성을 고려해서 소재를 선별하고,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을 보니 제가 이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도, 차별점도 크게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직물이라는 건 사람의 일생에 걸쳐 가장 가까운 소재잖아요. 그런데 그래서인지더욱 더 용도를 벗어난 목적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다양한 소재를 실험적으로 사용하며 파이브 콤마의 정체성을 담아 지금과 같이 미감을 더하는 오브제형의 작업을 하게 됐어요.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가구나 조명처럼 미학적인 부분과 기능성이 모두 충족되어야 하는 카테고리를 연구해 볼 계획이에요.
하반기 계획에 대해 알려주세요.
10월에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전시가 있어요.
‘소반'을 주제로 하는 전시인데,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참여하시는 다른 작가님, 디자이너 분들이랑 워크숍을 다녀왔거든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각자만의 고유한 방식이 있는 여러 분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새로운 영감을 받아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놀러 오시면 좋겠네요-!
정혜진 작가가 가을에 추천하는 음악
벤자민 클레멘타인(Benjamin Clementine) Tiny Desk Concert
https://www.youtube.com/watch?v=00yQGeJ6A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