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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아송] 옌롄커 1

<풍아지송 – [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 182 페이지

by YT

저 아래 [시경]이 있고, 그 위에 양커(소설 속 주인공)의 [시경] 연구서 ‘풍아지송‘이 존재하며, 그 ‘풍아지송’을 제재로 옌롄커는 [풍아송]을 썼고, 나는 또 그 위에 [풍아송]의 감상을 쓰고 있다. 위로 길어 올려질수록 방대한 양의 [시경]은 축약되고, 소설이란 형식에 의하여 그 메시지는 모래바람에 산란하여 옅은 황토 안개가 된다. 현대의 하부를 이루는 [시경]은 저 밑에서 발효되어 황토 안개로 번지고, 사람들은 입안에서 씹히는 황토 알갱이에서 꿉꿉한 종교적 아우라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풍아송]을 짓게 된 계기일 것이다.

[시경]과 [논어] 같은 고전 작품은 강해, 강설, 해제, 집전, 정해, 주해라는 꼬리를 달고 조상들에 의하여 변형되었다. (가끔 ‘OO주해 강설’이라는 해석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런 변형에는 주석자들의 주관적인 선별과 견해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꼬리를 단 해설서들은 지금까지 TEXT의 확장된 지평에 머물렀다. 해당 TEXT에 대한 보완이고, 이해 증진이며, 가끔 관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방식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단순한 요리에 해당하는데, 직접 재료를 다듬고, 썰고, 끓여내지만 재료는 손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옌롄커는 요리하지 않는다. 절대 재료에 손을 대지 않고 요리한다. 이것은 증류 과정과 같다. [시경] 속 내용과 이미지를 소설로 증류시킨 것이다. 그래서 [풍아송]에는 [시경]의 향이 배어있고, 그 아우라가 알코올에 스며있다. 그래서 [시경]이 종교인 것이다. 종교는 문화와 같이 오랜 기간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었고, 우리의 모든 행동과 심지어 사고까지 지배한다.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증류된 위스키에서 보리를 느끼지 못하듯 , 증류된 것은 완전히 새로운 종이 된다.

[풍아송]은 굳이 표현하자면 ‘소설 시경’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경]의 시구는 외관상 소설의 서사와 병행하며, 선로를 떠서 미끄러지는 자기 부상열차처럼 서사와 병행한다. 이것은 TEXT의 이해와 느낌, 이미지를 서술하는 독후감의 형태와 닮았다. [풍아송]은 [시경]의 독후감으로, 플롯을 갖춘 소설로 만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의 행동은 그렇게 다양하지 못하다. 자신의 행동들은 일정 생활의 틀과 권역을 만들며 비슷비슷한 일상으로 감각의 대상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매일매일 읽는 책, TEXT는 그런 인간 경험을 확장한다. 그래서 독서 경험은 매우 빈번히 일어나고,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창작으로서의 독서 경험에 대한 서술은 여전히 원작에 권위를 더하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옌롄커의 [시경] 독후감은 그런 면에서 독특한 Creativity를 가지고 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구상하고 있던 나로서는 추월당했다는 매우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지만, 이것은 새로운 실험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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