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교육부는 학생 대다수의 사망으로 인해 2023-2024 학기를 공식적으로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2023년 11월 17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누적 1만 2천 명을 넘어섰다. 그중 약 5000명이 어린이인 것으로 집계되며 이밖에도 1800명의 어린이를 비롯해 3750명이 실종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10월 7일 가자지구의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며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현지시간 1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교전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결의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내가 지난 2023년 11월에 작성한 글의 첫 문단이다. 그 후 세계는 아직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음모론자 같은 한마디지만 언제나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현상 아래에는 '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팔 분쟁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지만 다 알지는 못한다. 함부로 누구의 편을 들기에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게 될 위험이 크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또 장사 얘기다.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로 가자지구는 중동의 화약고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내용물을 보충하지 않으면 창고는 머지않아 텅 비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무엇이 계속해서 불을 댕길 수 있는 화약을 공급하는가? 수많은 방향의 욕망과 이념에서부터 출발한 고통에 끝이 있긴 한 걸까? 누군가의 죽음 위에 누군가 이득을 계산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쟁은 장사꾼들의 훌륭한 쇼케이스다.
이전에 미국 남부에서의 백인에 의한 흑인 집단 린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문화'를 고발할 때 가장 결정적으로 충격을 주는 증거물은 린치 가해자들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남긴 사진들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드러내는 증거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보존하기 위해 찍은 사진들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폭로한다. 이스라엘군은 왜 팔레스타인에서 행하는 테러 행위를 찍고, 인터넷상에 올리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느낄까? 이 세 이야기는 특정 주제 아래에 함께 놓인다.
시오니스트들은 '땅 없는 민족에게 민족 없는 땅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들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은 권리 없는 자들에게 침탈당한 그들만의 성지이다. 이 폭력적이고 황당한 주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삶은 누구에게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살 땅이 있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몸을 길게 뉘일 땅이 필요하다. 그것은 아돌프 히틀러도, 조 바이든도, 알 시파 병원의 의사였던 함만 말로도 같다. 땅 위에서 삶을 영위할 권리가 힘을 잃어서는 안 된다. 권력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땅 위에 있는 권리에 대한 얘기다.
이 지역의 깊은 전쟁의 골을 지켜본 이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다시 누군가에게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한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이디어는 전염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물론 땅이 필요하지만 땅을 위해 인간이 죽고 나면 우리는 허망함을 보상으로 얻는다. 누군가 땅을 얻기 위해 인간의 죽음을 수단으로 삼고 그로 인해 얻어낸 결과물에 축배를 든다면, 모두가 그 잔인함을 축복할만한 노력이었다고 말한다면, 범인류적 수준에서 한 아이디어가 전염병처럼 돌게 될 것이다. '어떤 인간의 삶은 가치가 떨어진다'는 아이디어다.
인류가 살아가는 데에는 인간의 삶은 숭고하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 앞에서 경제적 이득, 민족성, 방패로서의 이념과 같은 것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해야 마땅하다. 인간의 생명을 응당 귀히 여겨야 한다는 이 당연해 보이는 믿음은 단순한 사회적 합의를 넘어 인간의 기준이 된다. 국제 사회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지켜보며 고통받는 이유가 여기서 기인한다. 우리는 서로가 '인간적'이기를 원한다. 인간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길 바라며 무고한 희생은 없길 소망한다. 서로 동정할 수 있기를 원한다. 자신이 타인의 삶을 동정함으로써 또 다른 타인에게서 자신의 권리 침해에 대한 동정의 목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인생을 건 보험 말이다.
어떤 인간의 삶이 가치가 떨어지는가? 답은 이미 위에서 기술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불쾌가 알고 있다. 어떤 권력자도 생의 귀중함을 절하하지 못한다. 그렇게 믿는 것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