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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nic May 19. 2024

2024 상반기 봤어야 할 영화 5편

추천을 빙자한 무비 로그




2024 상반기가 거의 지나가고 있는 시점인 지금, 현재까지 내가 본 영화를 추천하려 한다. 아직 못 봤다고 애 탈 필요는 전혀 없고 언젠가라도 보면 좋겠다. 아래는 각각 포스트를 적으려고 각만 재고 바빠서 업로드하지 못한 글들의 짜깁기에 가깝지만 머쓱해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묶인 이상 짧고 간단하고 스포 없다는 조건으로 영화를 소개한다.



<추락의 해부>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작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이 상당한 호평을 받았었다. 내게 <추락의 해부>는 <괴물>에서 하고 싶었지만 미숙하게 풀어낸 이야기를 한 층 더 세련되게 풀어냈다는 감상을 주었다. <괴물>을 봤다면 벌써 이 영화의 주제를 이해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내게 <괴물>은 나쁘지 않은 영화였지만 약간은 신파적이고 뻔하며 제한적인 상황 설정에서 억지로 끌어낸 감명을 강요하는, 관객에게 감동받을 것을 요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 ‘산드라’의 남편 ’사뮤엘‘의 추락사로 인해 남편 살해 혐의를 받고, 그것을 벗기 위해 자신을 변호가며 사건을 해부해 간다. ’산드라‘는 독일인으로,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이주해 살고 있으며 남편과는 영어로 대화해 왔다. 프랑스어로 대화는 가능하지만 모국어인 독일어나 영어만큼은 능숙하지 않다. 법정에서 ’산드라‘는 프랑스어로 진술하기를 요구받고 다른 언어로 바뀌는 과정을 거치며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흐려진다. ’산드라‘에게 불리한 증거들만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발버둥 칠수록 부부 관계에서의 적나라한 사실까지 파헤쳐진다. 혹시 모른다. ‘사뮤엘’은 자살한 걸까? 우리는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기를 선택해야 한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해부당한 ‘산드라’의 가족 관계와 일상, 계속되는 재판으로 인한 불필요한 관심, 매스컴의 억측과 아들 ‘다니엘’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버텨내도 남는 것은 없다. 영화를 보며 관객은 ‘산드라’의 유죄 입증을 스스로 따져보게 된다. 그런데 결말이 어떻게 나와도 믿을 수 있겠는가? 관건은 ‘어떻게 믿고 싶은가’. 우리가 이 영화를 해부한 다음에는 뭐가 남을까?




<파묘>.




<파묘> , 장재현


<검은 사제들>, <사바하>로 한국 오컬트의 믿고 보는 감독이 된 장재현 감독의 신작이라는 말에 큰 인기를 끈 영화 <파묘>다. 확실히 디테일을 살리고자 하는 감독의 노력,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연출하는 방식 등이 전작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전작들과 <파묘>가 특히 다른 점은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신의 존재와 같은 관념적 주제를 다뤘던 작품들과 달리 이번에는 현실적인 민족의 아픔을 담았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이름 또한 모두 독립운동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 초중반부터 감탄하며 보게 되는 배우 이도현과 김고은의 매력이 영화 전체를 견인한다. 영화 중반부가 지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극적으로 노선을 바꾼다.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무서운 것. 그것을 보여주기만 하는 오컬트 공포물에서 민족사와 결합한 사명 어드벤처로 탈바꿈한다. 확실히 직설적이고 오락 영화스럽다. 참고로 안 무섭다.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유태오 필모그래피에 굵직하게 남을 작품. 이 영화를 보고 배우 유태오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기란 힘들 것 같다. 물론 ‘영어를 못하는 척하는구나’하는 감상은 피하기 힘들지만, 지나간 첫사랑을 붙잡은 눈이 잡힐 때마다 그런 생각은 흐려진다. 미장센은 때로는 왕가위 <중경삼림>의 한 부분이 생각나기도 하고, 중후반부 전체적으로 뉴욕의 풍경을 잘 담고 있기도 하다. 예상외의 인물이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의 스토리 또한 잔잔하게 아름답다. 한국에서 서로의 첫사랑이던 노라와 해성이 노라가 이민을 가며 헤어졌다가, 20년 후 뉴욕에서 재회한다. <라라랜드>의 결말을 좋아한다면 무조건 보라. 누구에게나 화양연화와 시절인연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너무 허무해하지는 않아도 된다. 사라진 추억을 붙잡고 살아가는 멜랑콜리아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현재 부존재하는 것은 그때에는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허구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사라진 것들에서 가치를 찾는 멜랑콜리아로서 과거를, 멸종한 것들을, 스스로 퇴장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일은 멈출 수 없겠지만 한정 없는 과거로의 회귀와 스스로 요청한 우울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내 주는 한 줌의 위로를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로봇 드림>





<로봇 드림>, 파블로 베르헤르



<로봇 드림>? 그거 애들 영화 뭐 얼마나 슬프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느끼며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만 들리면 가슴이 울렁거리게 될 테니까. 2D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심지어 <로봇 드림>에는 대사도 없다. 그럼에도 눈물을 훔치며 나오는 관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스토리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특히 로봇의 꿈이 거듭되면서 몰입도의 파장은 중첩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 간 만화 영화가 큰 파도가 되어 덮쳐 올 것이다. 결말은 바로 위에서 추천한 <패스트 라이브즈>와도 맞닿아 있기도 하다.



<챌린저스>



<챌린저스>, 루카 구아다니노, 저스틴 커리스케스



이 영화를 본 친구가 말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흥행의 나라에서 <챌린저스>가 흥행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관객의 수준이 증명되는 것이라고. 다소 격한 표현이지만 영화를 봤을 때 <챌린저스>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지는 것은 맞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잔인한 말이지만, 아름다운 퀴어 영화라는 희소성, 그걸 이루는 최고의 OST, 티모시 샬라메의 소년미가 다 한 영화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인간의 내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대신 스토리 측면에서는 다소 불친절한 경향이 있었다. 이번 작 <챌린저스>는 테니스를 둘러싼 세 사람의 관계와 정열, 욕망에 대한 영화다. 솔직히 주관적으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현대인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는 싹 다 끌어모은 것 같다. 폴리아모리, 청춘, 실패, 재회, 스포츠, 배신, 우정. 처음부터 끝까지 도파민으로 가득 찬 영화다. 특히 젠데이아의 연기가 더 좋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디즈니 채널 공주인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감독의 위트는 한 층 더 높은 차원으로 격상한 것 같았다. 내가 테니스공이 된 것 같은 카메라워크와 경기장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화면은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다. 4D로 보면 정말 놀이기구 타는 것 같다는 후기 또한 보았다. (개인적으로 포스터는 좀 못 뽑은 것 같다.)






여기까지 짧은 영화 소개는 끝이 났다. 2024년이 벌써 반쯤 지나가고 있다. 연초에 세운 계획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든 간에 시간은 흘러간다. 지난 몇 개월을 돌아보자.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냈다는 게 중요하지 않나? (엄밀히 말해 아직 정확히 6개월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체감 상) 이왕 이렇게 반년 산 거 남은 반년 또 잘 보내면 된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우아하게 성공과 실패를 만끽할 것이다. 시간 나면 전시회도 가고, 영화도 보면 좋고. 거창한 목적으로 영화 리뷰를 쓰기보다는 나는 항상 내 생각을 나누고 이 글로 인해 이 영화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인 것뿐이다. 모두 조금씩 더 풍요롭게 살 수 있길 바라며 또 영화 많이 보고 얘기할 거리를 들고 오겠다.



https://youtu.be/f8LqE9_3HRQ?si=VxdQbVj3w-PqFc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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