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인 사진이 본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를 요합니다.
1939년 할리우드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개봉되었다. <오즈의 마법사>, <역마차>, <젊은 미스터 링컨>도 마찬가지다. 이 나날은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기로 회자된다. 위 영상은 흑인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 1939년 라이브다.
<Strange fruit>은 시인 아벨 미로폴이 직접 자신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 내놓은 곡으로, 빌리 홀리데이가 부른 버전은 1999년 타임 지 선정 세기의 노래가 된다. 나무에 매달린 까맣고 이상한 열매에 대한 이 곡은 20세기 남부에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빈번히 일어난 백인들의 집단 린치를 비판한다. 그들이 남부의 토양에서 자란 나무에 맺은 과실은 흑인의 시체이다.
1774년 버지니아 주 치안 판사 찰스 린치 Charles Lynch가 적법 절차 없이 용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즉결 처형하는 판례를 세웠고, 이 즉결 공개 처벌은 매우 큰 유명세를 가져왔다. 이를 토대로 시민들의 자력구제가 활성화되며 공개적인 처형으로 사회 구성원 간의 결속력은 끈끈해졌다. 흑인들의 입을 빌려서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백인 중심으로 굴러가던 남부 농장주들의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당시 대다수 흑인들은 아직도 직업의 형태로 '주인'의 일을 대신하고 있었음에도 남부의 백인들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열등감과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용맹한, 굽히지 않는, 마음이 따뜻한 남부의 전통이라는 위안이 필요했다. 흑인이 감히 자신들의 사회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제재하는 자력구제의 발판 위에서였다. 흑인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참정권을 얻어도 자유로울 수 없는, '나는 아니다'라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Black body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The bulging eyes and the twisted mouth
Scent of magnolia sweet and fresh
And the sudden smell of burning flesh
Here is a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For the sun to rot, for a tree to drop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백인의 흑인에 대한 집단 린치는 20세기 남부 농촌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큰 다리 위에서, 포플러 나무에서, 정의JUSTICE가 적힌 교수대에서, 나무 수레 위에서 흑인들은 맞아 죽었다. 집단 린치의 대표적인 수행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 이 일은 진상을 알 수 없다. 피해의 규모와 피해자의 진술 모두 불분명하며, 근처에는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 흑인이 있다. 이에 분노한 정의로운 백인이 소리친다. "저 범죄자를 처벌하라!" 흥분한 백인들은 마을에 이벤트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린다. 선량한 백인들은 모인다. 흑인은 결백을 주장한다. 이미 피로 범벅이 된 후이다.
백인들의 눈 아래서 용의자는 집단 폭행을 당한 후 나무에 매달린다. 아침에 꺼낸 옷을 입은 그대로이다. 그에 화형까지 더할지는 정의의 심판자인 백인의 재량 하에 결정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 아래로 그들은 시민 정의와 자력구제,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말을 쏟아내고 카메라가 설치된다. 그들은 렌즈를 본다. 사진은 백인들의 기념엽서로 쓰인다.
린치는 남부 전역에 걸쳐 일어났으며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도 거행되었다. 1939년 빌리 홀리데이는 strange fruit의 음원을 내놓으며 그녀 개인에서 민족적 역사로 확대되는 섬뜩한 진실을 담담한 태도로 조명했다. 후에 이 노래는 큰 히트를 치게 된다.
2023년 5월 1일, 뉴욕의 지하철에서 흑인 정신질환자가 다른 백인 승객에게 목이 졸려 사망한다. 적극적으로 흑인 노숙자를 '제지'하는 데에 가담한 것은 세 명의 백인 남성들이다. 약 15분 동안 흑인 노숙자는 양팔을 붙잡힌 채로 헤드록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며, 질식으로 숨지는 광경은 그대로 상황을 관전하던 시민의 카메라에 담긴다. 목을 조른 것은 만 24세의 백인 남성으로 전직 해병대 군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혐의 없이 구금에서 풀려난다. 우리는 무엇이 바뀌었다고 믿는가? 누가 함부로 정의로울 권리를 갖는가?
조던 필 감독은 2017 <겟 아웃>으로 유례없는 파장을 선보인 뒤 2019년 <어스>를 발표하고, 2022년 <놉(NOPE)>을 세상에 내놓았다. 혹자는 <놉>이 그전에 발표한 조던 필의 작품들보다 인종차별적 문제를 조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던 필은 <겟 아웃>이나 <어스> 보다도 세련되고 섬세한 방식으로 레이시즘 문제를 대두시킨다. 다만 미래 지향적인 화법을 택했을 뿐이다.
주인공 O.J는 서부극의 백인이 맡던 주인공처럼 말을 타고 '저 너머'에서 등장하며 그의 동생 에메랄드는 바이크를 타고 <AKIRA>의 명장면처럼 화면을 채운다. 흑인이 할리우드에서 이룩할 수 있었던, 이룩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조던 필의 쇼 비즈니스이다. 얼마나 그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동하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클래식 SF영화의 틀 아래 놀라울 정도의 비판이 겹겹이 들어 있다. 하나하나 각주를 달아도 모자랄 정도다. 마치 진 재킷의 소화기 속에 들어 있던 상상할 수 없는 먹이들처럼.
<놉>에서 주인공 남매는 미확인 비행 물체(UAP)를 카메라에 담아 할리우드의 전설을 쓰고자 한다. 주인공 O.J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말을 관리하는 말 농장을 운영한다. 그의 동생 에메랄드는 그의 일을 돕기도 하며 각본을 쓰기도 하고, 그 스스로 연기까지 하며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준비생이다. 큰 건을 해보겠다는 에메랄드의 열정은 대단한 수준이다. 그가 촬영장에서 쾌활하게 영화의 시초인 '움직이는 말' 연속 사진에서 말을 탄 기수가 흑인이며, 자신들은 그 후예인 영화사의 왕족이라고 전하지만 그다지 대단한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고 에메랄드는 여전히 오지 않는 일자리 제안에 할리우드에서 성공할 방법을 고민한다. 반쯤 우스갯소리로 하는 자기 PR용 훅이지만 영화 결말에서 O.J는 정확히 이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를 만든다. 아과 둘세에 나타난 UAP를 찍어내겠다는 에메랄드의 광기에 가까운 집요함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O.J의 의지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매우 강해진다.
그들이 이 미확인 비행 물체 촬영본으로 할리우드에서 성공했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남매가 자신들의 신화를 썼다는 점이다. 남에게 허락받은 것도, 침해받은 것도 아닌 오직 그들의 것이자 미래로 이어질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놉>은 할리우드의 흑인들에게 조던 필이 선물하는 신화적 상상력이다.
<놉>은 2023년 제95회 아카데미에서 어떤 부문에서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일견 <놉>에서 비추는 할리우드 노동자 차별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한 결과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여전히 하얗다. 위 사진에서 얼마나 많은 유색인종 후보자를 찾을 수 있는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팀의 7관왕 소식과 대비되는 <놉>의 후보 노미네이트 실패에 대한 여러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또 <놉>에 등장하는 한국계 미국인 리키 주프(스티브 연 분) 캐릭터에 대해, 2021년 뉴욕 지하철에서 벌어진 아시안 여성 폭행 사건에 대해 나 스스로 또한 아시안으로서 고찰해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권이 일어나는 것이 다른 문화권의 패배를 의미하는가? 그 승패를 판가름하는 권력이 여전히 백인 사회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의 인권이 상승하는 것이 곧 나머지의 것이 하락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허락받는 것에 익숙하다. 굴절혐오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흑인의 마약 범죄에 대해서, 미국 내 강력범죄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에 대해서, '노예 근성'과 게으름에 대해서, 조직 권력 유지형 폭력에 대해서-감히 목숨을 위한 것이나 순전한 분노로 유발된 것이 아닌 '할렘에서의 자리'를 위한 폭력은 얼마나 부정한가에 대하여-얼마나 많은 담론이 있는지 셀 수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것이 아무 역사적 맥락 없이 그들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을 누구의 손에 맡겨야만 하는 일인가? 정의를 판가름하는 주체, 허락하는 주체라는 환상은 오래된 폭력이다.
다시 한번 소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고자 한다. 우리는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에서 섬뜩한 전율을 느낀다. 빌리 홀리데이는 어느 날 재즈 공연 중 백인으로부터 '그 흑인이 매달려 죽는 섹시한 노래 해봐요'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미국 남부의 집단 린치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기념엽서로 돌아다니게 됐다. 2023년 5월 뉴욕의 지하철에서는 흑인 노숙자가 목 졸려 숨졌고 이는 영상으로 기록되어 소셜 미디어를 헤맸다. 어떤 것은 단지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다. 개인의 피해, 사람들의 목숨, 한 문화권의 역사, 헤어 나오기 위한 노력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소비되는 피사체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사회에서 찍는 주체, 즉 결정할 주체로서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가 여기 있다. <놉>은 영화 스토리 자체적으로, 그리고 영화 바깥의 현실에서 어디까지가 스펙터클인지에 대한 경계를 지적한다. 판단하는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현실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다가는 언젠가 현실에 숨통을 물릴지도 모른다는 경고이다.
수잔 손택은 피사체를 촬영할 때, 그것이 '찍을만한 것'이라는 촬영자의 판단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한 가지 희망을 가질만한 부분은 '왜 그것이 찍을만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우리의 양심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스펙터클로 소비할 수 있는가? 2023년, 몇몇 기업인은 스스로 우주를 여행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실행에 옮기는 시대이다.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프랭클린에게 핵무기 개발을 제안한 1939년으로부터 얼마나 우리는 떨어져 왔는지 묻고 싶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피부색 때문에 죽는다. 세계가 변하지 않았다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등장할지 기대하는 사람은 단지 인류의 일부분만이 될 것이다. 그를 외면하고 양심의 외침을 기피하며 전진하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의 그토록 빛나는 지성의 의미가 단지 그 정도의 영역에서 그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100년 동안의 고뇌가 우리를 지금 다른 세대로 이끌지 않았다면, 단지 보는 것에 그쳐 그 안의 진의를 내포한 내레이션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 재킷 아래의 집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