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바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의 감독 그레타 거윅이 내놓은 <바비>가 상영관에 걸렸다. 먼저 상업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행위는 보통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동기에서 온다는 말을 해야겠다. 상업 영화는 그 영화를 보고 즐거움을 얻는 관객의 니즈가 분명히 있으리라 예상되기 때문에 제작된다. 오직 '보고 싶어서'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갑자기 무슨 얘기냐 하면, 무슨 영화든 '페미 영화'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영화를 평하며 숟갈 얹어보려는 사람들이 눈을 홉뜨고 다가온다는 얘기다.
<바비>는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차치하고 그냥 보더라도 즐거운 영화다. 바비의 집이 열리는 모습,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 헤드와 우유가 흐르지 않는 컵, 거품이 없는 칫솔, 하이힐을 벗어도 발 끝으로 서 있는tip-toe 발 모양까지. 대단한 상상력과 뻔뻔한 내레이션은 관객을 사로잡는다. 또한 거대한 세트장을 지은 보람이 있는 영상미가 눈을 즐겁게 한다. 마고 로비와 '스테레오 타입 바비'의 싱크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영화는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오마주한 시퀀스로 시작한다. 내레이션과 함께 인형 놀이를 하던 여자아이들 사이에 대형 바비로 분한 마고 로비가 나타난다. 아기 인형만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은 바비를 본 후 아기 인형을 부수고 던진다. 인형 놀이 중 엄마의 역할만이 허용되던 과거에서 바비의 등장으로 인해 여자아이들의 역할에 대격변-물론 이 도약에는 한계가 명확하다-이 일어났음을 이토록 수월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두 아는 '그 장면'을 사용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바비>의 레퍼런스를 정리한 리스트를 타임지에서 정리해 두었다. 보고 가면 더 즐거울 것이다.
메타적 요소로 내레이션을 도입한 것 또한 이 영화의 현명한 장치 중 하나인데, <바비>라는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우화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스크린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전지적 목소리는 영화를 동화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정을 '그냥 받아들이라'라고 말하는 목소리와 바비의 대사는 대담한 선택이다. 동시에 무리수 설정에도 준비되어 있을 관객을 예상한-아예 설득력을 포기한-유머러스한 도발에 가깝다. '대놓고 말하는 것'의 과감함이다. 이것이 <바비>의 전체적인 스탠스를 설명한다. 대놓고 말하기.
영화 <바비>는 현세대가 분명히 목도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어떻게 보면 리얼리즘이다. <바비>에서 깊고 진중한 얘기는 사실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현실의 수면으로 분명하게 떠오른 성차별을 그저 현상 위주로 증언할 뿐이다. <바비>에서 관객 대다수가 난생처음 들어볼 철학자 이름을 줄줄이 거론한다면 이 영화는 더 이상 상업 영화가 아니게 될 것이다. 뭔가를 얻길 원하면 우리는 이 유머러스한 비꼬기 속에서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바비>가 그것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무슨 대단한 걸 원하는가? 하기 싫으면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나는 매우 페미니즘적으로 사유할 것이다.
<바비> 스토리의 발단은 바비가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나타난다. 대통령, 대법관, 공사 인부, DJ, 작가, 심지어 인어까지 모두 여성인 바비랜드에서 완벽한 매일을 보내던 바비에게 죽음이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죽음을 상상하지 않는 바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곧 이 문제는 심각해진다. 바비답지 않은 생각을 하자 바비의 발 모양이 바뀌고, 셀룰라이트가 생기며, 입 냄새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비는 다시 완벽한 생활을 누리길 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비가 현실로 떠나며 이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된다.
영화 <바비>에서 바비 랜드는 마치 에덴동산처럼 결백한 환경이다. 여기서 바비(마고 로비)는 '질문하는 자'로서 고민한다. 이런 바비를 따라 현실 세계로 온 켄(라이언 고슬링)의 가부장제 전파로 인해 바비 랜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일찍이 성경에서는 사과를 먹은 이브를 잘못을 저지른 인간으로서 벌하고 아담이 이브의 주인이 되리라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성차별적 해석을 낳는다(그 자체로도 성차별적이다). 뱀의 꼬임에 넘어가 사과를 먹은 이브 이후로 여성을 악하고 두려운 존재, 선한 남성을 타락시키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브는 궁금해하는 인간으로서의 여성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아를 분리하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인간으로서 이브가 최초로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의 바비도 비슷하다. 아무 문제없는-것처럼 보이는-바비 랜드를 떠나 현실의 문제를 깨닫게 만드는 시발점은 바비가 바비들에게는 터부시 되는 것(죽음)에 대하여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장과 가능성을 만든다. 바비는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성장한다.
바비 랜드는 현실의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가 전복된 사회다. 바비가 다 해 먹고 켄은 '그냥 켄'인 바비랜드를 보며 웃던 관객은 현실은 바비 랜드 같지 않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에서 미러링으로서의 바비 랜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례로, 영화에서 바비를 제작하는 완구 회사 '마텔'의 운영진은 모두 남성이라는 것 또한 어떠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여아를 위한 완구를 만드는 사람은 정작 남성이라는 것이다. 여성 임원은 아무도 없냐는 질문에 마텔의 CEO는 창사 이래로 2명이나 있었으며 자신도 아내의 남편, 딸의 아버지, 이모의 조카이기 때문에 완전히 여성의 편이라고 대답한다. 게다가 그곳의 모든 남성들은 여성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인 기만적 자기 옹호를 우리는 현실에서도 질릴 만큼 접했다.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낸 바비가 바비 랜드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이미 켄이 전파한 가부장제에 완전히 식민지화되어 있다. 대통령 바비, 작가 바비, 대법관 바비 등 모든 바비는 켄에게 맥주를 서빙하며 켄을 찬사 하기 바쁘다. 바비들은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보다 켄에게 사랑받는 것이 편하고 즐겁다고 말한다. 바비의 사랑과 관심을 원하는 켄들과 달리 '매일이 여자들 밤!'이라고 외치던 원래의 바비들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다.
여기서 '사랑'에 관하여 다시 한번 사유할 일이 생긴다. <성의 정치학>의 저자 케이트 밀렛은 이성 간의 낭만적 사랑은 여성의 눈을 흐리게 하는 보상으로 작용하며 기사도는 부당성을 감추는 기술이라고 지적했다. 낭만적 사랑은 성의 권력관계에서 공공연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는데, 그것이 주는 극적인 환상에 너무나 매료되고 이러한 관습이 고착화된 나머지 우리는 당연하게 낭만적 사랑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굴러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켄이 원하는 낭만적 사랑을 바비가 이루어주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 켄의 불만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는 플롯은 켄 또한 무의식적으로 낭만적 사랑만을 바랐고 이것이 가부장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쨌든 바비는 이 낭만적 사랑에 빠진 켄을 다시 무기로 이용한다. '모르겠어'를 외치는 바비들에게 여지없이 우쭐대며 다가오는 켄들의 모습은 또 하나의 유머다. 포토샵, 영화 <대부>, 운동을 알려주며 켄이 충족감을 느끼는 사이 가부장제에 빠졌던 바비를 몰래 데려와 원래대로 돌려놓는 부분은 그들이 기사도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얄팍하고 자아도취적인지에 대한 지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국 낭만적 사랑의 노예로서 질투에 빠진 켄들은 서로 싸우다 바비 랜드를 켄 랜드(미안하다. 켄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로 바꾸기 위한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후에 바비는 슬퍼하는 켄에게 울어도 된다고 말하며 바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지 말고 본인 그 자체로 켄을 정의하기를 권한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켄의 자아 찾기' 파트다. 한국에 이 영화를 홍보하며 '페미니즘' 대신으로 등장했던 '휴머니즘'이라는 단어가 나올 구석이 바로 여기에서 나타난 듯했다. 내내 낭만적 사랑이 정답인 줄만 알고, 끝까지 바비에게 입을 맞추려던 켄에게 사랑의 확장을 말하는 장면이다. 로맨틱한 사랑에서 자신의 유일성을 찾는 것을 그만두기를 권하는 대충 그런 이야기다.
통쾌함을 원하고 극장에 들어온 관객에게 이러한 후반부 전개와 너무 많은 후반부 켄의 분량은 다소 뜬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솔직히 말해 영화 내내 계속된 미러링에 대한 정신적 타격을 보상하는 수단으로 이 장면이 사용되었다는 감상을 지울 수는 없긴 하다. 계속해서 질문하고 성장하는 바비와 달리 바비의 사랑을 원하는 켄의 멍청함이 대조적으로 비춰지며 여성 관객에게 마음껏 켄을 비웃을 심리적 보상을 제공했으므로 내내 남성 관객은 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굳이 남성의 멍청함을 강조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양적으로 보더라도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여성 캐릭터의 몫, 유머의 상당 부분은 남성 캐릭터의 몫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완벽히 떼어놓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지금까지 백치 여성 캐릭터로 많은 유머를 뽑아 먹은 역사에 환급을 요구하는 일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몇 번 백치 남성으로 유머 영화를 만들어 팔아먹어도, 그래도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제 켄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켄분할 것 같다.
바비는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온 바비 랜드에서 완벽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바비는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바비와 달리 죽음이라는 결말이 정해진 인간이 되기를 택한다. 이렇게 바비는 영화 초반부에 그가 던졌던 '죽음'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찾아낸다(영화에서 휴머니즘적 코드를 찾는다면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바비는 바비의 발명자로부터 바버라라는 이름을 얻는다. 모두 장난감인 바비 랜드와 달리 실제로 숨을 들이쉬고, 냄새를 맡고, 쏟아지는 물을 맞고, 인간으로서의 생을 살기 위해 바비는 현실 세계로 걸어 들어온다. 하이힐이 아닌 버켄스탁 샌들을 신고.
이 영화는 잘 만든 상업 영화다. 보는 내내 화려한 연출과 출연진의 훌륭한 연기, 곳곳에 박힌 유머, 듣기 좋은 노래에 나는 관객으로서 기꺼이 웃었다. 여기에 뭔가 두려워할만한 것은 없다. 그저 이런 영화를 원했던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즐겁게 볼 수 있을 거라는 예감뿐이다. 이 영화의 좋은 점만큼 아쉬운 점 또한 명백하나 나는 여기서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커다란 괴물이라도 이 영화 안에 포장되어 있는 듯한 반응은 이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바비>를 괴물화하지 말라. 이 안에 코드화하여 숨겨둔 거대한 진리를 여성들만이 누리고 그 반대편은 크게 공격받아야 하는 것처럼 굴지 말라. 속칭 '갈라 치기'같은 영양가 없는 단어로 이 영화를 구태여 설명하지 말라. 그저 사실 관계에 핑크를 칠한 이 예쁜 우화에 말이다. 그냥 OST 듣고 흥얼거려라. 이 영화가 불편한가? 이 영화가 그렇게 두려운가? 한 마디로 정리하겠다. 웃어라. 분위기 망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