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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숙 Jun 21. 2021

엄마가 꿈에서 자꾸 다친다

엄마의 억척스러움과 나의 요람

"손을 더럽히는 거에 무뎌지기가 싫어서요.”


 언젠가 회사에서 가장 친한 동료 분이랑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였다. ‘혜숙 씨는 아이 낳기가 왜 싫으세요?’라는 질문에 대답할 것들은 수십 가지였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은 저거였다. 아이를 낳고, 삶의 중심이 아이로 옮겨가면서 어딘가 억척스럽게 바뀌는 엄마의 모습이 싫어서. 고상한 어른이 되는 데에 ‘아이’라는 선택지는 아직까지 내 수중에 존재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은 비슷한 성적의 내 주변 친구들에 비해 학교 생활에 관심이 없던 편이었다. 정말 가끔은 신경을 써 줬으면 싶을 때도 있었지만 90프로는 그런 방임형 부모님이 더 편했고, 어딘가 모르게 나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우쭐한 마음도 있던 것 같다. 한편 그런 부모님도 학교 생활에 신경을 쓰는 게 딱 하나 있었는데, 어디서 보고 들은 건지는 몰라도 학교에 갈 때면 선물을 꼭 한 개씩 사 가는 것이었다. 안 했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장난스럽게도, 화를 내면서 말해봐도 다 이렇게 한다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는 부모님이 미웠지만 더 싫은 건 매번 못 이기는 척 덥석덥석 받아내는 선생님들이었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렇게 타협하게 될까. 하하호호 웃으면서 내 앞에서 내 좋고 나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싫어서, 학부모 상담은 내가 싫어하는 학교 생활의 일부분이었고, 닮고 싶지 않은 어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지위에 있더라도 손을 더럽히지 말아야지. 손을 더럽히더라도 무뎌지지 말아야지.’ 그 외에도 종종 억척스러운 엄마의 모습을 보면 마음의 채점표를 꺼내 들어 O, X를 마음대로 써 갈겼다.

 이렇듯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에는 사랑과 존경도 있지만 철면피와 우악스러움도 있어서.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생각에 부끄러워한 적도 있고, 그 부끄러움에 제 발 저리듯 죄책감을 느껴 혼자 반성하기도 했다. 딸의 예의라는 마지막 자존심에 쪽팔린다는 말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지만, 마음에 서리가 끼듯 부끄러운 감정이 드는 것을 애써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엄마가 요즘 꿈에서 자꾸 다친다. 지난 꿈에는 다리가 사람 키만 한 들개들이 길거리에 나타나서 나와 동생을 후려치려고 하자 나보다 작고 왜소한 엄마가 그 앞을 막아섰다. 얼굴과 배를 발로 가격 당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비명은 당신의 아이들을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일종의 다짐은 포함하고 있어도 도움을 요청하는 신음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억척스럽게’ 우리를 지켜 나갔고, 나는 동생의 눈을 가리며 울다가 엄마를 외치면서 칼칼한 목에 놀라 깼다.

 엄마는 왜 꿈에서조차 나를 지키려 했을까. 사실 이건 엄마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라 나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나는 왜 엄마가 나를 구하도록 했는가.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꿈에서조차 나는 엄마의 객기와 억척스러움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다. 엄마의 뒷모습은 5년 전, 10년 전의 제 딸을 위해서라면 손에 더러운 것 정도는 얼마든지 묻힐 수 있다는 억척스럽고 뻔뻔한 등과 멀어졌는데. 꿈에서조차 나는 무엇 하나 막아내지 못하는 건장한 젊은이이자 엄마의 작은 딸이었고, 꿈에서조차 엄마는 무엇이든 막아내고자 하는 노쇠한 중년이자 세 아이의 엄마였다.


 어쩌면 나는 그 ‘억척스러움’이 지금까지 나를 길러 온 요람인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도 손에 더러운 거라고는 조금도 묻히고 싶지 않은 뜨거운 심장을 가진 때가 있었겠지. 그런 엄마에게 깐깐한 채점표를 들고 양심을 평가하는 것은 고상함을 팔아 억척을 산 사람에 대한 조금은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도 엄마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하루 종일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붕 뜬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엄마한테 연락은 못했다. 꾸역꾸역 잘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딸이 되고 싶어서, 이제는 그 객기와 억척의 요람을 직접 쌓아 올릴 수 있는 딸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데 잘 산다고, 걱정 말라고 말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미끈한 눈을 부끄러워하며 눈동자를 치켜올리는 것뿐이다.

 엄마 아빠가 슈퍼맨인 이유는 모든 위협을 막아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막아낼 수 없음에도 막아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멋지고 사랑스러운 허세가 있을까. 평생 그 허세에 속고 싶다. 그래도 이제 다치지 마세요. 내 나약한 마음이 오늘 꿈자리에서는 엄마를 다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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